1. 탄트라의 세계
The Book of Secrets
마음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112가지 수행법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부딪친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해답을 찾으려 한다. 목마른 영혼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왜 태어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도 없이 무지와 무관심, 무감각에 빠져버린 메마른 의식과 안일한 삶의 태도에서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여기 최고의 인생 기서가 있다. 그리고 그 기서를 명쾌하게 현대어로 강의하는 인생의 명인 오쇼가 있다. 마음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112가지 수행법을 제시해놓은 『탄트라 秘典』은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들을 푸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5천 년 전 시바는 그의 연인 데비에게 112절로 이루어진 탄트라 방편들을 전수했다. 그것의 이름은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Vigyana Bhairava Tantra)’이다. 여기서 비그야나는 ‘의식’을 말하고 바이라바는 ‘초월’을 의미하며 탄트라는 ‘방편’을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전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의식 초월 방편’이 된다. 당신은 인생의 최고 기서인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 대한 삶의 명인 오쇼의 명쾌한 강의를 통해 인생의 단수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범부에서 성인으로 입성할 것이다.-출판사 제공 책소개

탄트라의 세계
The World of Tantra
탄트라는 지적인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산 체험이다. 그대가 수용적으로 되고. 준비되고. 느낄 만큼
예민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그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탄트라의 세계
데비가 묻는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원소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우주의 중심에 앉은 자는 누구입니까?
형상들로 충만하며 동시에 모든 형상들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
SUTRA:
DEVI ASKS:
OH SHIVA, WHAT IS YOUR REALITY?
WHAT IS THIS WONDER-FILLED UNIVERSE?
WHAT CONSTITUTES SEED?
WHO CENTERS THE UNIVERSAL WHEEL?
WHAT IS THIS LIFE BEYOND FORM PERVADING FORMS?
HOW MAY WE ENTER IT FULLY, ABOVE SPACE AND TIME, NAMES AND
DESCRIPTIONS?
LET MY DOUBTS BE CLEARED!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살펴볼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의 세계는 지성적이거나 철학적인 세계가 아니다. 여기에 이론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기교와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도덕이나 원칙 같은 것도 없다. ‘탄트라' 라는 말 자체가 방법이나 길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것은 철학이 아니다. 이 점을 주시하라. 탄트라는 지적인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사물을 ‘왜’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문제로 대한다. 그것은 ‘진리가 무엇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리에 이를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또한 '탄트라'라는 말은 테크닉을 의미하며 이런 접근 방식은 과학적인 것이다. 과학은 ‘왜’라는 의문보다는 '어떻게' 라는 의문에 더 관심을 쏟는다. 바로 이 점이 과학과 철학의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철학자는 '이것은 왜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과학자는 이렇게 묻는다.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대가 '어떻게'라고 묻는 순간, 그때는 방법 즉 테크닉이 중요해진다. 그때 탁상 공론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심이 되는 것은 경험이다.
탄트라는 과학이다. 탄트라는 철학이 아니다.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거기에는 오직 지능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대는 변화할 필요가 없다. 거기서는 그대의 변형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있는 차원에서 그대로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탄트라는 다르다.
탄트라에서는 그대의 변화를, 그대의 차원적 승화를 요구한다. 그대가 달라지지 않는 한 탄트라는 이해되어질 수 없다. 탄트라는 지적인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 체험이다. 그대가 수용적으로 되고, 준비되고, 느낄 만큼 예민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그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철학은 생각만으로, 그대의 두뇌만으로 충분하다. 거기에 그대의 전체성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의 전부를 요구한다. 그것은 훨씬 깊은 도전이다. 그대는 그 속에서 전체가 되어야 한다. 탄트라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그대의 전 존재를 바치는 길이다. 물론 여기서 데비의 질문은 철학적인 질문이며 추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탄트라는 데비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철학적인 질문 자체가 이미 추상적이며 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질문은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철학적이냐 아니면 본질적이냐', 혹은 ‘지적이냐 아니면 전체적이냐' 하는 것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랑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대는 그것을 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거기에 이론을 덧붙이고 가설을 세울 수 있으며 결론을 이끌어낼 만큼 체계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론을 세우는 데는 경험이 필요치 않다. 차라리 적게 알수록 더 과감하게 체계와 이론을 세울 수 있다. 오직 장님만이 빛이 무엇인지를 손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알지 못할 때, 무식할 때 대담해지는 법이다. 앎은 사람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대가 많이 알면 알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 간다. 많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크게 느낀다. 그래서 진짜로 현명한 사람들은 무지로 돌아간다. 그들은 어린아이나 바보처럼 단순해지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되려 한다면, 이론으로 하나의 체계를 세우려 한다면 그대는 적게 알수록 좋다. 그래야 일이 쉽게 된다. 지적인 문제에만 국한시킨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적인 것은 결코 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사색이나 추론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대의 존재를 변형시키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진실로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야 되는 법이다. 사랑에 대한 이론과 철학을 안다고 해서 그대가 몸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체험만이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대는 다른 사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올 때는 이미 그대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옛날의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 거기에 하나의 틈이 생겼다.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새 사람이 나왔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의 의미이다.
탄트라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데비는 매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시바는 데비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처음부터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당황할 것이다. 시바는 데비의 질문에 어떤 해답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데비가 묻는 질문에 시바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질문은 데비의 질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질문은 끊임없이 그대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질문의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데비의 질문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오직 시바만이 대답할 수 있다. 시바의 차원에 이르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진정한 해답을 보여줄 수 없다.
데비는 ‘당신의 실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시바는 그것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한 가지 테크닉을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데비가 그 테크닉을 통과한다면 그녀는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진정한 해답은 언제나 질문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바는 '내가 누구다' 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 단지 한 가지 방편, 하나의 테크닉을 가르쳐 줄 뿐이다. 그리고 그 테크닉을 수행하면 그대 역시 해답을 알게 될 것이다.
탄트라에서는 행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앎은 없다. 그대가 뭔가를 행하지 않으면, 그대가 변화되지 않으면, 사물을 바라보는 그대의 시각이 달라지지 않으면, 지적인 차원 이상의 차원으로 옮겨가지 못하면, 거기에는 해답이 없다. 물론 여러 가지 그럴싸한 대답들은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거짓말들이다. 모든 철학적 해답들이 그러하다. 그대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철학은 거기에 맞추어 대답한다. 그러면 그대는 만족스럽기도 하고 불만족스럽기도 하다. 만약 그것이 그대를 만족시키면 그대는 그 철학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그 속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 그것이 그대를 만족스럽게 하지 못한다면 만족할 만한 철학을 만날 때까지 찾아다닐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그대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감동받지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상태로 말이다.
그대가 힌두교도이건, 불교도이건, 아니면 기독교도이건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단지 그대를 가리고 있는 가면이며 옷일 뿐이다. 교회나 사원, 혹은 모스크에 가더라도 똑같은 사람이 간다. 단지 가면만 다를 뿐이다. 복장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가면과 복장은 모두 가식이며 거짓이다. 그것을 들추어 버리면 똑같은 사람이 나온다. 똑같은 공격성, 똑같은 분노, 폭력, 탐욕, 질투 등등, 모든 것이 똑같다. 기독교도의 성(性)이 불교도의 성과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도의 폭력이 이슬람교도의 폭력과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모두 마찬가지다. 사람은 같은데 입고 있는 옷이 다를 뿐이다.
탄트라는 그대의 옷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탄트라는 옷 속에 감추어진 그대 자신을 바라본다. 만약 그대가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빛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빛에 대해서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빛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탄트라의 영역이다. '빛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즉시, 탄트라는 묻는 자에게 그가 지금 눈먼 상태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런 다음 그를 변형시켜 그로 하여금 빛이 무엇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탄트라는 결코 빛이 무엇이라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빛으로 인도하고 빛을 보게끔 눈을 띄워 준다.
그래서 탄트라의 해답은 지적인 것이 아니다. 눈먼 사람에게 빛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면 이것은 지적인 것이다. 하지만 눈먼 사람 자신이 직접 눈을 떠서 빛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탄트라를 지적이 아니라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시바는 데비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한편 탄트라는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는 확실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탄트라의 언어는 시바와 그의 연인 데비 사이의 대화이다. 데비는 묻고 시바는 대답한다. 모든 탄트라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왜? 왜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선생과 학생의 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연인끼리의 달콤한 속삭임이다. 둘 사이에 사랑이 없다면 깊은 가르침은 전달되어지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연인만큼 깊은 관계여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이 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사랑의 언어이다. 제자는 사랑의 자세 속에 머물러야 한다. 탄트라는 제자가 수용성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제자는 여성의 수용성으로 표현된다. 오직 그때만이 뭔가가 가능하다. 그대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적인 수용성의 기질을 갖추어야 한다. 데비는 묻는다. 그것은 여성적인 질문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면 왜 여성적인 태도를 이렇게 강조하는가?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다르다. 여성적인 마음은 수용성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받아들임, 완전한 신뢰와 헌신, 그리고 사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자는 이 여성의 심리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배울 수 없다. 그대가 닫혀 있는 한 그대는 해답을 얻을 수가 없다. 질문만 던지고서 닫힌 채로 남아 있다. 그때 해답은 그대를 통과할 수 없다. 그대의 문은 닫혀 있다. 그대는 죽어 있다.
여성의 수용성은 자궁의 받아들임이다. 그것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거기에는 단순한 수용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여성은 어떤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남성의 정액을 받아들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자기 몸의 일부가 된다. 그것은 결코 외부의 이물질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의 몸은 창조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태아는 그 속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제자에게는 자궁과 같은 수용성이 필요하다. 받아들이는 것은 죽은 지식을 긁어 모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것은 피와 살이 될 것이다. 그것의 성장은 그대에게 변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의 방식이다. 모든 탄트라 경전의 형식이 데비의 질문에 시바가 대답하는 것으로 일관되는데 데비는 시바의 여성 파트너이다.
한편 현대 심리학에서는, 특히 심층 심리학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극단적인 남자거나 여자이기만 한 인간은 없다. 모든 사람이 양성을 갖고 있다.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성을 갖고 있으며 여자이면서 동시에 남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서양에서 매우 최근에 발견된 사실이지만 탄트라에서는 수천 년 동안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의 하나가 되어 왔다. 그대는 시바가 아르다나리쉬바르(ardhanarishwar)의 모습, 즉 반남 반녀(半男半女)의 모습을 한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시바는 반은 남자, 반은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데비는 단순한 파트너가 아니다. 그녀는 시바의 다른 반쪽이다. 그리고 제자가 스승의 다른 반쪽이 되지 않는 한 스승으로부터 비법을, 심오한 가르침을 전수받기란 불가능하다. 그대가 스승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의심이 사라진다. 그때 비로소 논쟁이 사라지고 논리와 이유가 사라진다. 완전히 하나로 흡수되어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그대 속에서 그 가르침은 자라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그대를 변형시킨다.
논리라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논리적인 언어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다. 내가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면 나는 그대의 마음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확증을 주고 개종시켜서 나의 제자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때 나의 주장은 옳고 그대의 주장은 틀리게 된다. 논리적인 언어는 자아 중심적이다. 그것은 '나는 옳고 네가 틀렸다' 라는 것을 반드시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에고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에고에만 관심이 있다. 자신의 에고는 항상 옳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나의 에고에 더 이상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는 그대에게만 관심이 있다. 나는 내말을 증명하거나 나의 에고를 강화시키는 데 무관심하다. 나는 오직 그대를 돕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대가 성숙하고 변형되고 다시 태어나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두번째로 논리는 항상 지적이다. 그때 개념과 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그리고 논쟁이 중요해진다. 그때 무슨 말을 하든 사랑의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그렇지 않다. 그때 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말은 단지 가슴을 담는 그릇이다. 가슴과 가슴의 전달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드문 것이다. 파르바티(데비의 다른 이름)는 시바의 무릎 위에 앉아서 묻고 있고 시바는 대답한다. 이것은 사랑의 대화이다. 거기에는 어떤 갈등도 없다. 시바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왜 사랑의 언어에 대해서 이토록 강조하는가? 그대가 스승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때 모든 행동 양식이 변화된다. 그때 이미 그대는 귀를 통해 스승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마셔버리는 것이다. 그때 그의 말은 상관이 없다. 말 중간에 흐르는 침묵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 그의 몸놀림, 그의 자비와 사랑은 하나라도 놓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가 고집하는 구조이다. 모든 구절들이 데비가 묻고 시바가 대답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그대의 닫힘은 부서져 나가야 한다. 그때 스승은 약간 공격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편견과 선입관은 부서져야 한다. 그대가 과거를 완전하게 씻어내 버리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그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시바의 동반자인 데비의 자세가 아니다. 데비에게는 어떤 과거도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억하라. 그대가 사랑에 깊이 빠질 때 그대의 마음은 정지한다. 거기에는 과거가 없다.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남는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현재이며 유일한 시간이다. 지금이 전부이다. 거기에 과거나 미래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데비는 그저 열려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방어막도 없다. 이제 청소되거나 파괴되어야 할 그루터기가 남지 않았다. 밭은 준비가 끝났다. 씨만 떨어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씨앗을 받아들여 품고 싹이 트게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모든 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전해져왔던 것에 대한 것이다. 그것들은 시바에 의해 주어진 메시지로서 베다와 바이블과 코란의 가치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탄트라 각각의 문장들은 위대한 경전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보통 경전들은 교리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토론하고 보호하거나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토론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사랑의 문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라는 말은 직역하면 '의식을 초월하는 방편’이다. '비그야나(Vigyana)'는 의식을 의미하며 ‘바이라바(Bhairava)'는 의식을 넘어선 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탄트라'라는 말은 방편, 테크닉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식을 초월하는 방편'은 가르침 중에서도 최상의 가르침이다. 이것보다 더 고차원적 가르침은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무의식을 어떻게 초월할 수 있느냐', '어떻게 의식적으로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크리슈나무르티의 강의, 선사(禪師)들의 방편, 그것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좀더 인간이 의식적으로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더 깨어있을 수 있는가?', ‘좀더 의식 쪽으로 옮겨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이것을 하나의 이중성이라고 말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성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대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옮겨간다면 그것은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둘 다를 모두 넘어가라. 그대가 양극을 모두 초월하지 않는 한 결코 궁극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도 되지 말고 의식으로도 만족하지 말라. 초월하라. 존재하라. 의식적으로도 되지 말고 무의식적으로도 되지 말라.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선(禪)과 요가마저도 뛰어넘는다.
‘비그야나'는 의식을 의미하는 보통 말이지만 '바이라바'는 특별한 용어이다. 그것은 탄트라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로서 초월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그래서 시바는 ‘바이라바’로 데비는 ‘바이라비'로 알려져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이중성을 뛰어넘은 자들이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오직 사랑만이 초월에 대한 일별을 보여줄 수 있다. 그 때문에 탄트라 지혜의 기본 방편이 사랑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만이 모든 이중성을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들이 깊이 들어갈수록 하나가 된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둘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 이중성이 초월된 것이다.
오직 이런 뜻에서 예수가 ‘신은 사랑이다'라고 한 말이 의미가 있다. 다른 의미로는 그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상 사랑은 신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이 사랑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베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신은 사랑이다'란 말은 탄트라의 문구이다. 그것은 신 혹은 신성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실체가 사랑임을 의미한다. 왜인가? 사랑 속에서는 하나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두 가지로 나뉘어지지만 육체를 초월한 어떤 것이 하나를 이루게 된다.
사람들이 그토록 섹스를 갈망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갈망은 섹스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됨에 있다. 섹스를 통해서 두 개의 육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결합된 것일 뿐이다. 단 한순간 동안만 그들은 두 개의 육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신체적인 합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갈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거기에서 멈추어 버린다면 위험한 것이다. 이 갈망은 하나됨을 원하는 더 깊은 목마름이 숨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랑 속에서는 서로가 내면으로 녹아 들어간다. 거기에 하나됨의 느낌이 존재한다. 그때 이중성은 용해되고 만다. 이중성을 뛰어넘은 사랑 속에서만이 우리는 바이라바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얼핏 볼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바이라바의 경지는 되돌아옴이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다. 사랑의 정점에서는 떨어지는 법이 없다. 그 정점에 계속 머무름만이 있다.
우리는 시바가 카일라쉬(Kailash) 산에서 머무르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카일라쉬 산은 가장 높은 정점, 가장 거룩한 정점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시바의 거처로 만들었다. 우리는 거기에 갈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거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순례 여행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티르트라(Teerthyatra), 순례라는 말이다.
사랑 속에서 이 성스러운 순례 여행이 일어난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성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골짜기, 어두운 골짜기에 살고 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사랑의 정점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는 곧 떨어지고 만다. 그곳은 너무 현란하고 휘황찬란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너무 높고 그대는 너무 낮다. 거기에서 계속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사랑 속에서 계속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됨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시바의 거처이며 집이다.
바이라바는 사랑 속에 산다. 그것은 그의 거처이다. 내가 그의 거처라고 이야기할 때에 그는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대가 카일라쉬 산 꼭대기에서 산다면 그대는 거기가 카일라쉬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카일라쉬의 꼭대기에서는 카일라쉬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정점에서는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바는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을 인식한다. 우리는 사랑 밖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바는 사랑 자체이다. 바이라바의 경지는 그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정점에서 살고 있다. 이제 봉우리는 그의 거처가 되었다.
그러면 이 정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중성을 넘어서, 무의식을 넘어서, 의식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을 넘어서, 이 세상과 모크샤(Moksha; 대자유)를 넘어서, 여기와 저기를 넘어선 곳에 이를 수 있을까? 그 방편이 바로 탄트라이다. 탄트라는 순수한 방편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데비가 가진 의문부터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데비가 묻는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OH SHIVA, WHAT IS YOUR REALITY?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그대 역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데비가 그렇게 묻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라.
“당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데비는 사랑 속에 깊이 빠져 있다. 그대가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 처음으로 그대는 내면의 실체와 대면한다. 그때 시바는 형상이 아니다. 그때 시바는 육체도 아니다.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사랑하는 이의 육체는 사라진다. 형상은 사라지고 형상 없는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대는 심연을 대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의 육체를 대면할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때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심연을 대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만약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진정이라면 그대의 육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절정의 순간 형상은 용해되고 만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형상 없음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데비는 처음에 형상과 사랑에 빠진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 시작된다. 그녀는 시바를 한 남자로 사랑했다. 이제 그 사랑이 성숙되었을 때 그 남자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형상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제 어디에서도 그를 발견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곳에서 발견된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 물음은 가장 강렬한 사랑의 순간에 터져나오는 것이다. 대개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물음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에 한 가지 물음을 창조하라. 데비는 시바가 사라졌을 때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사랑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나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형상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그대는 육체로써 움직이고 육체로써 살아간다. 하지만 육체가 그대는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외부에서 바라볼 때 그는 하나의 육체로 보인다. 그의 내면을 꿰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내면을 관통한다. 그때 더 이상 우리는 외부적인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다. 내면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때 형상은 사라진다.

임제(臨濟) 선사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의 첫번째 행동은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이었다. '내 몸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그는 찾기 시작했다. 그는 제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가서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 좀 찾아오너라. 나는 내 몸을 잃어버렸다.”
그는 형상 없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대 역시 또 하나의 형상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을 직접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그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거울을 통해서만이 자신을 알 수 있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라. 거울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는 자신의 얼굴을 알겠는가? 만약 거울이 없다면 얼굴도 없다. 거울이 그대에게 얼굴을 주었다. 거울이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홀로 남게 된다. 전혀 거울이 없고 거울처럼 작용하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없다. 그대가 무인도에 홀로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그대에게 거울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얼굴이나 육체가 있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우리의 외형만을 알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외형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한다.
또 다른 선(禪)의 스승인 회해(懷海) 선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명상 속에서 너의 머리를 잃어버릴 때 그 즉시 나에게 오라. 그때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그때가 너의 수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이다. 그때가 되어야 드디어 너는 진정으로 배울 수 있게 된다.”
머리를 갖고서는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사랑 속에서만이 그대는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자신이 되어서 말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그와 하나가 된다. 처음으로 그대는 존재의 심연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형상 없는 현존a formless presence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수세기 동안에는 시바에 대한 어떤 초상화나 조각상도 조성하지 않았다. 단지 ‘시바링가(Shivalinga)'라는 상징물만 만들었을 뿐이다. 시바링가란 단지 빛나는 현존, 빛의 오라(aura)일 뿐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대가 어떤 사람 속으로 들어갈 때 그는 육체가 아니다. 빛나는 현존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데비는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 우주는 어린아이들만이 안다. 연인도 안다. 때때로 시인과 미친 사람도 안다. 그러나 그대는 모른다. 이 세계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그대는 알지 못한다. 그대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무미건조할 뿐이다. 그대로 하여금 춤추고 노래부르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의 내면에는 어떤 시도 솟아나지 않는다. 우주 전체가 완전히 기계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우주가 경이롭게 보인다.
그대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대는 다시 한번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예수는 '오직 어린아이 같은 자만이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왜인가? 우주가 경이롭지 않다면 그대는 종교적으로 될 수가 없다. 우주가 그대에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대의 기질은 과학적이다. 우주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경이나 신비가 없다. 그러나 그대의 눈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찰 때 이 우주는 하나의 신비와 미지(未知)의 것으로 나타난다.

데비는 물었다.
“이토록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WHAT IS THIS WONDER-FILLED UNIVERSE?
그녀의 질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갑자기 범개인적 차원으로 뛰어올랐다. 처음에는 ‘당신의 실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갑자기 질문의 차원이 바뀐 것이다.
형상이 사라질 때, 사랑하는 사람이 우주, 형상 없음, 무한이 될 때, 갑자기 데비는 자신이 시바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우주 전체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바는 우주 전체가 되었다. 모든 별들이 그 속에서 돌고 있다. 모든 공간이 그에 의해 둘러쳐져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거대한 울타리가 되었다. 칼 야스퍼스가 ‘신은 거대한 울타리'라고 정의했듯이 말이다.
그대가 사랑으로 들어갈 때 육체는 사라지고 따라서 개체 역시 사라진다. 사랑은 우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그대의 호기심은 과학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논리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그때 그대는 형상 없음에 대한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오직 형상에 매달리고 거기에만 집착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은 항상 형상에만 관심을 갖는다. 결국 과학은 최초의 형상 이상의 것은 정의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사랑에서는 형상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끝이 아니다. 형상을 용해시켜 버려라. 형상이 사라질 때, 어떤 경계도 없을 때 모든 것은 서로 다른 것 속으로 녹아든다. 그리하여 거대한 하나를 이룬다. 우주 전체가 커다란 하나이다. 그때 비로소 우주는 경이로 가득 차게 된다.

“이 모든 원소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데비는 계속 묻는다.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우주의 바퀴 중심축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이 바퀴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 바퀴의 중심에 앉겠는가? 그 축이 어디에 있는가? 움직이지 않는 중심축 말이다.
데비는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자신에게 묻듯이 계속 중얼거린다.
“형상들로 충만하며 동시에 모든 형상들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
마지막 이 말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만약 그대가 지적인 질문을 한다면 그 문제를 풀어주는 모범 답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데비는 단지 자신의 의심을 모두 없애 달라고 말하고 있다. 지적인 물음은 하나의 의문을 풀 때 하나 이상의 또 다른 의문들이 생겨난다. 어떤 답안을 주더라도 의심은 거기에 여전히 남아있다. 이 점을 명심하라. 의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의심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무슨 대답이 떨어지건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 그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 세상은 누가 창조했는가?”
그러면 내가 ‘갑이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대는 ‘갑은 누가 창조했는가?'라고 또 물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해결책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의심의 근원을 뿌리뽑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데비는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질문을 던질 때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미 해답도 갖고 있다. 단지 그대는 확증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해답이 옳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그 질문은 거짓된 것이다. 질문도 아니다. 그대는 자신을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단지 호기심에서 질문을 던질 뿐이다.
마음은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 낸다. 마치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듯 마음에서 질문들이 솟아난다. 그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그대가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조건 질문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것이 철학의 모든 역사이다.
버틀란드 럿셀은 노년에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렸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모든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 이 모든 의문들이 다 풀릴 것이다.' 하지만 내 나이 80세가 된 지금 그 의문들은 하나도 풀리지 않고 그대로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철학이란 모든 궁극적인 해답들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 말할수 없다. 오히려 철학은 끝없는 질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질문은 하나의 해답과 수많은 다른 질문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마음이 문제이다. 파르바티는 말한다.
“나의 질문에 개의치 마세요. 나는 많은 것들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나의 의심하는 마음을 없애 달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질문은 그 마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의심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을 해야 그 문제를 풀 수 있겠는가? 마음이 곧 의심이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바는 대답했다. 물론 시바의 방법으로 말이다. 그의 방법은 마음을 사라지게 만드는 테크닉이었다. 그리고 그 테크닉은 가장 오래된 테크닉이다. 또한 112가지 방편의 완벽한 세트를 갖추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가능성을 다 갖고 있다. 마음을 없애고, 마음을 초월하는 그 방편에는 어느 한 가지도 덧붙이거나 뺄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책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5000년의 나이를 갖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이만큼 오래되고 완벽한 책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가장 오래된 동시에 언제나 가장 새로운 것이다. 그 방편들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이 112가지의 명상법은 마음을 초월하는 과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먼저 우리는 그것에 대해 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지성은 단지 하나의 도구로만 사용하라. 그리고 이들 테크닉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대의 과거 지식은 한쪽으로 제쳐둬라. 그대가 지금까지 모아왔던 모든 알음알이들은 무엇이든지 제쳐둬라. 그것은 거울 위에 앉은 먼지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 방편들을 신선한 마음으로 만나라. 논쟁하려 들지 말라. 그러나 깨어 있어라. 논쟁하는 마음이 깨어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그대가 논쟁에 들어가는 순간 그대는 깨어 있음을 놓치고 만다. 그대는 더 이상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방편들은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들은 힌두교의 산물이 아니다.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상대성 원리가 유태교의 것인가? 전기가 기독교의 것인가? 그 누구도 그대에게 '왜 우리의 전기를 사용하는가?'라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과학은 그 어떤 민족이나 종교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탄트라는 과학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로 힌두교의 것이 아니다. 이 가르침은 힌두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 방편에는 어떤 종교의식도 담겨 있지 않다. 어떤 사원도 필요없다. 그대 자신이 바로 사원이 된다. 그대가 실험실이 된다. 모든 실험이 그대 속에서 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신앙심도 필요 없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 여기에 신앙은 필요치 않다. 코란이나 베다를 믿을 필요도 없고, 마하비라나 붓다에게 귀의할 필요도 없다. 교회에 다닐 필요도 없고 세례를 받을 필요는 더군다나 없다. 또한 불교도는 불교도로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 이 방편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굳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새로이 믿을 필요가 없다. 그대가 어떤 이념, 어떤 종교에 몸담고 있더라도 탄트라는 그대에게 개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탄트라는 종교란 단지 사회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그대 내면의 문제는 탄트라가 관여할 것이다. 그대 존재를 변형시키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탄트라이다. 그대가 믿는 종교의 궁극적인 상태는 오직 탄트라의 방편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 신앙심이나 교리를 통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 테크닉들을 수련하더라도 그대에게 어떤 사회적 변화도 필요치 않다.

탄트라는 항상 그대를 도울 것이다. 그대가 어떤 옷을 입고 있던지 말이다.
탄트라는 순수과학이다. 그대가 아플 때 병원에 가면 주사를 맞기 전에 몇 가지 마이신 반응검사를 한다. 그때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반응검사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불교도들에게만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는 일도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대의 신념체계가 무엇이든지, 그대가 사회주의자이건 자본주의자이건, 마이신 반응검사의 유형은 항상 똑같다.
그대는 무지하다. 아직도 그대는 갈등 속에 있다. 그대는 잠들어 있다. 이것이 바로 병이다. 영혼의 병인 것이다. 이 병은 오직 탄트라에 의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 그대가 무엇을 믿든 그것은 상관없다. 그대는 오직 탄트라를 통해서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거듭나는 것은 마음이나 믿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실제적 현상이다. 그래서 그것은 과학이다. 그래서 그대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그대가 변화되고 싶다면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라. 탄트라의 방편을 이용하라. 탄트라는 그대에게 헌금이나 신앙심, 혹은 순교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까지 탄트라는 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져도 그것은 완전히 왜곡되어 알려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탄트라는 매우 순수하고 고차원적인 과학이다. 일반 대중들이 그것을 이해하기란 극히 힘들다. 우리는 상대성이론의 이름만 들었을 뿐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때 전세계에서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12명뿐이었다. 아인슈타인조차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단지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그러한데 탄트라는 더 힘든 것이다. 그것은 변형이 뒤따라야만이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다. 논리만 갖고서는 부족하다. 따라서 탄트라를 통해서 변형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의 전달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탄트라는 대중들에게 전파될 수 없었다. 그대가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적어도 그것을 오해하게 된다. 그냥 진공인 채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떤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그것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니? 참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분명히 자체적으로 결함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해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그래서 탄트라는 그처럼 긴긴 세월 동안에도 대중들에게 전파되지 않았다. 탄트라는 세상에 나오는 즉시 오해되고 왜곡되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모두 현자로 변할 것을 두려워한 성직자, 종교지도자들이 탄트라를 왜곡시키는 데 가장 앞장섰다. 사실 탄트라는 모든 이중성을 뛰어넘고 있다. 그것의 관점은 완전히 무도덕(無道德) 적이다. 무도덕이란 말은 도덕적인 것도 비도덕도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서 도덕적이거나 아니면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뛰어넘어 무도덕적인 것은 판단하기에 매우 어렵다.
탄트라는 무도덕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한번 바라보라. 의학은 무도덕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것도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만약 그대가 도둑에게 약을 주어도 그 약은 들을 것이며 성자에게 주어도 마찬가지다. 약은 '나는 그가 도둑이므로 그를 죽게 할 것이고, 성자이므로 그를 살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의학은 과학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존재 역시 도둑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다. 탄트라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탄트라를 수행하기 위해서 도덕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탄트라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탄트라는 그런 사람을 보면 웃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열이 나서 병원에 갔다. 그런데 의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안된다. 먼저 열을 내리고 오라. 먼저 건강해진 다음에 오라. 그러면 약을 주겠다.”
이것은 다음의 이야기와 같다. 어떤 도둑이 성자에게 가서 말했다.
“저는 도둑입니다. 나에게 명상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성자가 말했다.
“먼저 너의 직업을 바꾸어라. 그리고 난 뒤에 명상법을 일러주겠다.”
또한 알콜 중독증 환자가 와서 말했다.
“나는 알콜 중독증 환자입니다.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성자는 또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술을 끊어라. 그리고 나서 명상을 배워라.”
그러나 이런 조건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을 말하는 것과 같다. 알콜 중독증 환자나 도둑이나 부도덕한 사람들은 병든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들은 병든 마음에서 생긴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병든 마음을 고치기 위한 치료약이 바로 명상이다. 그런데도 먼저 병든 마음을 고친 후에야 명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명상인가?
탄트라는 무도덕이다. 탄트라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다. 한 사람으로서 그대의 존재면 충분하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탄트라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맞는 테크닉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대의 전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부어라. 진정하고 참된 방편은 그대에게 어떤 선결 조건도 내세우지 않는다. 만약 어떤 방편이 그대에게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가짜라고 생각해도 된다. 도둑에게 도둑질을 고쳐야 명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에게는 명상이 불가능할 것이다.
욕심 있는 사람이 욕심의 대상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히 욕심을 버릴 수는 없다. 그대가 강요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대는 대체 효과를 내는 다른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 천국이라든지 모크샤(解脫)라든지 사치타난다(至福)라든지 하는 것을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욕심의 대상일 뿐이다.
탄트라는 그에게 진정한 방편을 주지 않는 한 결코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설교를 통해서는 어떤 것도 변화될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이 세상을 둘러보면 탄트라가 말하는 것들이 여기 저기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많은 군더더기들이 붙어 있다. 수많은 설교가들이, 종교지도자, 도덕군자들이 거기에 쓸데없는 사족을 너무 많이 붙였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오염시켜 놓았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더러운 것, 불결한 것 투성이인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가 그들을 정신병원에 데려다.놓아도 그들은 설교를 계속한다.
“당신은 틀렸다.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마음에 많은 병을 갖고 있다. 그 병을 고쳐라."
그들은 이 세상을 정신병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향해 설교를 멈추지 않는다.
“화내지 마라.”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방편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그 말을 듣는 그대는 이렇게 반문한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이다. 그런데 단지 ‘화내지 마라'라고 말하는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화를 억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화는 더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죄의식까지 수반된다.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려고 시도하지만 반드시 실패한다. 결국 그대는 열등감과 죄의식을 갖게 된다. 사실 분노와 대항해서 싸운다면 절대로 분노를 이길 수 없다.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자신과 싸워서 이겨본 적이 있는가? 결국에는 지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특별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 특별한 방편을 말이다. 그 방편은 그대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분노란 그대의 혼란된 마음에서 피어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면을 바꿔라. 그러면 외부도 변화될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소위 그대의 도덕성이라는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분노도 버리고 성욕도 버리고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는 인간이 아니다. 결국 그런 말을 계속 듣게 되면 사람은 열등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만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고 결국 자신이 죄인이라는 확신만 더욱 커진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온 세상에다 증명시킨다. 그래야만이 그들은 그 직업을 계속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죄인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교회나 사원이나 모스크가 계속 번창할 것이다. 그대의 죄는 그들의 밥줄이며 그대의 죄가 깊어질수록 그들의 교회는 높이 올라간다. 그들의 번영은 그대의 죄 위에, 그대의 열등감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지위를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탄트라가 비도덕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탄트라는 그대의 마음 자체를 변형시키는 과학적 방편이다. 그리고 마음이 변형되면 그대 역시 달라질 것이다. 뿌리가 바뀌면 가지도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직자와 종교지도자들은 탄트라의 가르침이 전파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종교와 도덕이라는 미명으로 탄트라를 왜곡시켰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라. 기독교는 과학의 발전에 계속 반대해왔다. 한번 그대가 자연의 비밀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종교적인 설명으로는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을 변화시키는 비밀을 알고 나면 조만간에 마음에 대한 변화의 비밀도 알아내고 만다. 마음 역시 미묘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탄트라의 기본 전제이다. 마음은 미묘한 물질이다. 그래서 그것은 변화될 수 있다. 한번 그대가 변화된 마음을 갖게 되면 그대는 다른 세계를 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보이는 세상은 그대의 특수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어라. 그러면 세상 역시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마음이 없어진다면 그것은 탄트라의 궁극적 경지이다. 탄트라가 궁극적으로 꾀하는 것은 그대의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드디어 중재자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중재자가 사라질 때 비로소 그대는 실체와 직접 조우할 수 있다. 이제 그대와 실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탄트라는 말한다. 마음이 사라진 상태를 바이라바의 경지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무심(無心)의 상태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갖고 있다면 마음은 그대 앞에서 세상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대 마음의 투사체이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바꾸어라. 그대의 마음을 무심으로 바꾸어라. 그러면 이 112가지 방편들이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물론 그 방편 모두가 그대를 도와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112가지로써 충분하다. 이 안에 다 들어있다. 그러니 그대에게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 그리고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각각의 방편들을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맞는 방편을 고르라. 우선 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보라.
어떤 방편이 그대에게 적합한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조립품처럼 즉시 그대에게 잘 맞을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애매 모호함도 없다. 그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 방편들을 하나씩 실험해 보라.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대에게 맞는 한 가지 방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대가 너무 심각하게 그것을 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단지 놀이하라. 그러면 어떤 것이 그대에게 딱 들어맞을 것이다. 그때 심각해져라.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강렬하게, 진지하게, 그대의 전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그러기 전에는 단지 놀이처럼 가볍게 다루라.
한 가지 방편에 대해서 적어도 사흘씩은 해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부적합하다는 확신이 들면 다른 것으로 옮겨가라. 그리하여 그대의 방편을 찾게 될 때 다른 방편들은 모두 잊어버려라. 그리고 한 가지 방편에만 매달려서 삼 개월은 꾸준히 해야 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에게 맞지 않는 방편은 아무리 해봐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맞는 방편은 단 삼 분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112가지 방편은 그대에게 기적적인 체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니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보라. 체험을 얻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나는 가능한 여러 각도에서 그것들을 설명할 것이다. 그대에게 맞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사흘 정도 그것을 실험해 보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그대에게 맞는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삼 개월 동안은 계속하라. 그대의 삶은 기적으로 변할 것이다. 아직 그대가 그 신비를 알지 못했다면 오직 이 탄트라의 방편만이 그대에게 그 신비를 맛보게 해줄 것이다.
시바는 112가지 방편을 제시했다. 이것은 모든 가능한 방법들이다. 만약 여기에서도 그대가 맞는 것을 찾지 못한다면 이제 그대에게 다른 방법은 없다. 이 점을 기억하라. 그리고 수행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저 기쁘게 살아라. 그대는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112가지 방편들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어떤 것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 세대를 위한 것이고 어떤 것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다. '이 112가지 방편 모두가 나에게 맞지 않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는 인간 마음의 모든 형태들이 다 고려되어 있다. 아직 한번도 사용되어 본 적이 없는 방편도 있다. 그것은 미래 어느 때쯤 나타날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많은 방편들이 이미 쓸모없는 것도 있다. 그것은 과거의 인류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그대에게 맞는 방편은 많이 있다. 그리고 그대가 찾기만 한다면 반드시 찾을 것이다.

Chapter 2: The Path of Yoga and the Path of Tantra
<질문>
Q “탄트라와 요가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고 있다. 탄트라와 요가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물론 목표는 같다. 그러나 목표에 이르는 길은 다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분명하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요가의 과정 역시 하나의 방법론이다. 그것은 똑같이 테크닉인 것이다. 탄트라처럼 요가도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실행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다르다. 요가는 투쟁의 길이다. 그것은 전사만이 가는 길이다. 그러나 탄트라의 길은 전혀 싸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사랑하고 녹아드는 길이다. 물론 깨어 있음 속에서 말이다.
요가는 깨어 있음 속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길임에 반해 탄트라는 깨어 있음 속에서 자신을 마음껏 풀어주는 길이다.
탄트라는 '그대가 누구이든지 궁극은 그대에게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성장이다. 그대는 궁극에까지 성장할 수 있다. 그대와 실체 사이에는 어떤 반대점도 없다. 그대는 실체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갈등도, 싸움도 없다. 본성을 거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대는 본성을 사용해야 한다. 그대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누구이든지 그대의 본성을 사용해야 한다.
요가에서는 초월로 가기 위해서 그대 자신과 싸워야 한다. 요가에서는 세상과 모크샤, 사바 세계와 열반, 현재 있는 그대로의 그대와 미래에 변화되어야 할 그대가 대립되게 된다. 그리하여 그대는 자신을 억압하게 된다. 요가에서의 초월은 죽음이다. 그대의 진짜 존재가 태어나기 위해서 그대의 옛사람은 죽어야 한다.
탄트라의 눈으로 보면 요가는 고차원적 자살이다. 그대는 본능적인 자아를 죽여야 한다. 그대의 육체, 욕망, 인간의 모든 바람들을 말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전체적인 수용이다. 그대와 실체 사이에 어떤 간격도 만들지 않는다. 세속과 니르바나를 결코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탄트라에서는 죽음이 필요 없다. 단지 필요한 것은 그대 자신을 이용한 초월만이 있다.
예를 들어 섹스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기본 에너지이다. 그 기본 에너지를 통해서 그대는 태어났다. 그대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세포 역시 그것에서 나왔다. 이제 인류는 섹스에 대해서 새로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요가에서는 그대가 이 섹스 에너지와 싸우라고 한다. 싸움을 통해서 그대는 자신 안에 새로운 다른 중심을 만든다. 그대가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 할수록 새로운 중심에 집중된다. 그때 섹스는 더 이상 그대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섹스와 싸우는 것은 그대의 새로운 중심을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그때 더 이상 섹스는 그대의 에너지 중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에너지가 존재 속으로 흘러 들어올 것이다. 존재의 다른 중심으로 말이다.
탄트라에서는 그대의 섹스 에너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 그것과 결코 싸워서는 안된다. 그것을 받아들여 승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에너지이다. 그것은 악이 아니다. 모든 에너지는 그저 자연이며 중립적인 것이다. 그대가 사용하기에 따라 그대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그대를 해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대는 그것을 하나의 장벽으로 만들 수도 있다. 혹은 그것을 하나의 징검다리나 받침돌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적절하게 사용하라. 그것과 친구가 되라. 보통 사람이 섹스를 사용하면 그것은 적이 된다. 그것은 그를 파괴시키고 구덩이 속에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요가는 그런 일상적인 마음에 반대한다. 일상적인 마음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신을 파괴시킨다. 그래서 요가는 욕망을 버리라고 말한다. 욕망과 싸워서 그대를 욕망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욕망을 지켜보라고 말한다. 그것에 대항하지 말라고 한다. 단지 깨어 있으면서 그 속에서 움직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깨어 있으면서 욕망 속에 움직일 때 그대는 그것을 초월한다. 그대는 그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속에 있지 않다. 그대는 그것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동시에 그대는 방관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요가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일상적인 마음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열등감과 죄책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마음을 비판하고 나서면 그럴싸하게 보인다. 그래서 요가의 언어를 통해 일상적인 마음을 판단해 버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는 섹스가 어떤 식으로 그대를 노예로 삼고 파괴하는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가에서 성욕과 싸우라고 말할 때 그대는 즉시 그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곧 요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이유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쉽게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욕망에 휩쓸리지 않고 욕망 속을 돌아다니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떻게 오르가즘 속에서 말짱한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을까? 일상적인 마음은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위험해 보인다. 사실 그대는 자신이 욕망 속에서, 섹스 속에서, 모든 것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속이는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이 교활한지 알고 있다. 또한 그대는 자기가 정신이 말짱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감추고 있다. 그대가 위험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위험은 탄트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속에 있다. 요가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도 그대 때문이다. 그대의 일상적인 마음, 성을 억압하고 성에 굶주리고 성에 몰두하는 마음 때문이다. 일상적인 마음은 성에 대해서 건강하지 않다. 그래서 성과 싸우게 하는 요가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성은 그 경우가 다르다. 사실 우리는 비정상적이며 부자연스럽다. 우리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며 불건강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잘못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미친 것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되어서 오히려 미치지 않은 것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붓다가 비정상이고 예수가 비정상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영역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상이 우리에게는 비정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비정상적인 마음이 정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요가는 우리의 비정상적인 마음에 설득력이 있다. 만약 우리가 섹스를 자연스럽게 대한다면, 거기에 어떤 철학을 내세워 반대하거나 찬성할 필요가 없다면, 그저 자연스런 것으로서 전체적으로 수용된다면 그때는 탄트라가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때라야만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이용될 것이다.

이제 탄트라의 시대가 몰려오고 있다. 조만간 탄트라는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탄트라가 수천 년 전부터 있어 왔지만 이제서야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은 탄트라를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의식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탄트라가 공개될 수 있는 것은 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사람들의 의식이 성숙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폭발의 시기는 서양에서 먼저 시작될 것이다. 프로이드, 융, 라이히 이후로 서양은 그 토양을 준비해 왔다. 서양의 심리학은 이제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병이 모두 섹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결론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 이 섹스에 얽힌 무의식적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사람은 결코 정상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 인간은 성에 대한 잘못된 태도 때문에 결국 정신적 불건강 상태를 얻게 되었다. 다른 태도는 필요하지 않다. 오직 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만이 필요하다. 그대의 눈에는 섹스가 어떻게 보이는가? 신성하게 보이는가? 아니면 사악하게 보이는가? 그것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눈은 정상이다.
만약 어떤 태도라도 취한다면 그때는 그대의 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라. 탄트라는 그대가 어떤 사람이건 모두 받아들인다. 그리고 오직 전체적인 수용을 통해서만이 그대는 성장할 수 있다. 그때 그대가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이용하라. 먼저 그것들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에너지가 무엇인지, 섹스가 도대체 무슨 현상인지 이해하라. 우리는 그것을 피하기만 해왔다. 섹스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많이 들어 왔다. 그러나 그대는 모두 죄의식 속에서 그것들을 대해 왔다. 억압적이고 급하고 주저하는 마음속에서 말이다. 이제 그 모든 짐을 벗어 버릴 때가 왔다. 성행위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그대는 그 속에서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떠날 수는 없다. 그대가 떠나려고 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 그것에 묶이게 된다. 부정하면 할수록 그대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태도는 결국 그대의 마음을, 그대의 각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섹스는 아무런 감수성도 없이 계속된다. 그러면 결코 그대는 섹스를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통찰력을 통해서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들이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 때처럼 깨어 있어야만이 그대는 섹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때만이 말이다.
만일 그대가 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대는 정원을 지나갈 때 눈을 감고 급히 지나갈 것이다. 그대는 미친듯이 서두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그 정원을 빠져나왔는지 그대는 알 수 있는가? 꽃들이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우며 그 정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탄트라는 그대가 어떤 상태이든지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수많은 차원의 복합 에너지를 갖고 있는 거대한 신비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깊은 감수성과 통찰력과 애정을 갖고 그대 자신을 대하라. 그때 모든 욕망은 그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하나의 수레가 된다. 그때 모든 에너지가 도움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 이 세상은 니르바나이며 이 육체는 하나의 사원이 된다.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이다.

요가는 부정의 길이다. 반면에 탄트라는 긍정의 길이다. Yoga is negation; tantra is affirmation. 요가는 이중성을 통해서 생각한다. 요가란 말 자체가 두 개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두 개가 거기에 있다. 이중성이 거기에 존재한다. 탄트라는 ‘이중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만약 이중성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대가 어떻게 하든지 그대는 분열된 채로 남아있다. 싸움은 계속될 것이고 이중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만약 이 세상과 신성이 둘이라면 그때 그것들은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 만약 그것들이 둘이 아니라면, 단지 두 개로 보여지는 것일 뿐이라면 그것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만약 그대의 영혼과 육체가 둘이라면 그때 그것들은 하나가 될 수 없다. 만약 그대와 신이 두 개의 존재라면 거기에는 합일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둘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탄트라는 말한다. 이중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그대 눈의 착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중성으로 나타난 형상들은 그대의 의식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 그 이중성을 없애 버려라. 하나가 되라! 싸움이 아니라 수용을 통해서 그대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육체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대속에 어떤 다른 중심도 만들지 마라. 탄트라에서는 그대의 다른 중심을 에고라고 부른다. 에고를 만들어내지 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각하라. 만약 그대가 싸우려 든다면 거기에 에고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에고이스트가 아닌 요기를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요기들은 끊임없이 에고 없음, 즉 무아(無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무아가 될 수 없다. 그들의 길 자체가 에고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와의 갈등이 곧그들의 수행 과정이다. 그대가 싸움을 계속한다면 반드시 에고를 만들어내고 만다. 그리고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에고는 더 강화된다. 만일 그대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때는 지고한 에고가 형성될 것이다.
탄트라는 싸우지 말라고 말한다. 그때 에고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대가 탄트라를 이해한다면 거기에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싸움이 없다는 것이 곧 심취한다는 뜻이 된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흐르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반대로 너무 좋아한다. 그때 우리는 두려워진다. 우리는 생에 집착할 뿐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탄트라는 심취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심취하되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그대는 화가 나 있다. 탄트라는 절대로 화를 내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 가슴으로 화를 내라고 말한다. 단지 깨어있으면서 말이다. 탄트라는 영적인 잠, 그대의 무의식적 상태에 대해서만 반대할 뿐이다. 깨어 있으면서 화를 내어라. 이것이 바로 키포인트이다. 그때 그대가 분노를 인식한다면 그것은 변형될 것이다. 분노는 자비로 바뀔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말한다. 분노는 그대의 적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것은 자비와 똑같은 씨앗이라고 말이다. 분노와 자비는 같은 에너지이다.
만약 그대가 분노와 싸우려든다면 그때는 자비로 변형될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그대가 싸움을, 억압을 계속한다면 그대는 식물인간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는 어떤 분노도 일어날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자비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분노만이 자비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억압을 계속한다면 ─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 거기에는 섹스도 없고 따라서 사랑도 없다. 섹스 에너지가 말라 버리고 나면 사랑의 꽃을 피울 힘이 없다. 그리고 인생은 모든 의미를 다 잃고 말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신성도 없고 자유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생물적인 대사작용만 있다.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것은 식물인간과 다름없다.
탄트라는 말한다. 이 모든 동일한 에너지들이 변형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만약 그대가 세상에 반대한다면 그때에는 니르바나도 없다. 이 세상 그 자체가 니르바나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니르바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그대가 근원에 대해 반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탄트라의 연금술은 싸우지 말라고 말한다. 그대에게 주어진 모든 에너지와 친구가 되라고 말한다. 그것들을 환영하고 고마워하라고 말한다. 화를 내고 섹스를 갈망하고 삶에 대해 집착하는 이 모든 욕망이라는 에너지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때 그것들은 변형될 수 있다. 그것들은 무한을 향해 열려질 수 있다. 그때 섹스는 사랑으로 변형될 것이다. 독이 변하여 약이 되듯이 말이다.
씨앗은 겉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구석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될 때 거기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따라서 씨앗을 내던져 버리지 마라. 그리하면 꽃도 함께 내던지는 것이 된다. 아직 그대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씨앗 속에는 꽃의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그대가 꽃을 원한다면 씨앗을 소중히 여겨라. 따라서 먼저 받아들임이 중요하다. 이해와 깨어 있음이 필요하다. 그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몰두와 심취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상한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탄트라의 가장 깊은 비밀 중의 한 가지이다. 그대가 적으로 삼는 것은 무엇이든지 분노, 탐욕, 증오, 성욕 따위 그대보다 더 강한 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대의 적으로 여겼던 것을 신이 준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라. 예를 들어 탄트라는 섹스 에너지를 변형시키기 위해서 많은 테크닉을 개발시켰다. 성행위를 시작하는 것을 마치 신성한 사원에 다가가는 것처럼 행동하라. 마치 기도처럼, 명상처럼 하라. 그것의 거룩함을 느껴라. 카쥬라호 사원에 있는 마이투나(性交) 조각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사원의 벽면에 섹스 행위를 묘사해 놓은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나 회교도, 자이나교도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어떻게 거룩한 사원이 돌로 조각된 섹스 행위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는가? 성당이나 교회, 혹은 절에 그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그대는 상상도 못해봤을 것이다.

현대의 힌두교도들 역시 그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인도가 백년 이상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상 힌두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의 지도자 중의 하나인 푸르쇼타마다스 탕돈은 카쥬라호 사원을 파괴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그것은 인도인의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사실 탄트라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가슴속에 숨어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수세기 동안 주류가 되지 못했다. 반면에 요가는 인도인의 정신적 주류가 되었다. 그래서 요가는 카쥬라호를 용납할 수 없다.
탄트라는 마치 그대가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는 것처럼 섹스 행위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전에 섹스 행위들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그러했다. 그대가 성전에 들어갈 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섹스 역시 거기에 있어야 한다. 거기에 어떤 것도 제외되거나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온전한 하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신성이 서로 싸우는 두 가지 반대 극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겉으로는 마치 반대 극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반대 극처럼 보일 때만이 그것들은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양극성이 사라진다면 온 세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 마라. 깊은 곳에서 흐르는 하나됨의 흐름을 보라.
탄트라에서는 모든 것이 신성하다. 이 점을 명심하라. 탄트라에서는 신성하지 않은 것이 없다. 탄트라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러나 비종교적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부정하다. 어떤 것도 거룩하지 않다. 한 기독교 선교사가 어느 날 내게 와서 말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죄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악마가!”
그래서 나는 또 물었다.
“그러면 악마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러자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한참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악마도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악마는 죄를 만들었고 하나님은 악마를 만들었다. 그러면 누가 진짜 죄인인가? 악마인가? 하나님인가? 그러나 이런 이원론자들은 언제나 말도 안되는 개념을 고집한다. 탄트라에서는 신과 악마가 둘이 아니다. 탄트라에서는 '악마'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신성하다. 이것이 올바른 관점이며 건강한 시각이다. 만약 이 세상에 어떤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그러므로 양자 택일의 길밖에 없다. 첫번째는 모든 것이 부정하다고 말하는 무신론자가 있다. 이 태도 역시 좋다. 적어도 그는 이원론자는 아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어떤 거룩함도 보지 못한다. 또 한 가지는 탄트라의 태도이다.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종교적인 사람과 비종교적인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세포나 원자라도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때 이 세상은 완전히 부정한 것이 되고 만다. 세포 하나, 원자 하나라도 이 세상과 동떨어져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니 본래 하나이다. 단지 여러개라고 보는 것은 우리 시각의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온전히 거룩한 것으로 보든지 아니면 완전히 부정한 것으로 보든지 두 가지 관점밖에 없다. 어떤 것은 부정하고 어떤 것은 거룩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여기에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탄트라이고 다른 하나는 요가이다. 탄트라는 우리의 표면적인 의식 때문에 별로 호소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이 정말로 건강하고 혼돈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탄트라가 너무나 아름답게 비칠 것이다. 오직 그 사람만이 탄트라가 무엇인지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혼란스런 마음에는 차라리 요가가 더 설득력이 있다.
어떤 것에 매력이 있고 없고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결정권을 갖고 있는 자는 바로 그대이다. 내가 지금 요가를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궁극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유행하는 요가는 '아니올시다’이다. 그 요가는 진정한 요가가 아니다. 그대의 병든 마음이 내린 해석에 의해 지금의 요가는 왜곡되어 있다. 올바른 요가라면 그대는 자동적으로 궁극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대의 마음이 건강할 때만이 가능하다. 단지 탄트라와 가는 길이 틀릴 뿐이다.
예를 들면 마하비라는 요가의 길 위에 있다. 그러나 그는 성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알았고 그것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서 섹스가 떨어져나가 버렸다. 붓다 역시 요가의 길 위에 있다. 그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았고 그것을 깊이 이해했다. 그는 결코 그것과 싸우지 않았다.
그대가 한번 알고 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되면 마치 낙엽이 떨어지듯 그것은 그대에게서 떨어져나가 버린다. 다시는 그것으로 인해서 신경쓰일 일도, 싸울 일도 없다. 붓다의 얼굴을 보라. 그것은 싸우는 사람의 얼굴과 다르다. 그 얼굴은 완전히 이완되어 있는 얼굴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대 주위에 있는 요기들을, 수행자들을 한번 보라. 그들의 얼굴에는 싸움과 갈등의 표정들이 역력하다. 그들은 마치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그대는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병든 마음을 깊숙이 억누르고 있다. 그들은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세계는 남을 흉내내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 그들은 삶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들을 변형시킬 수 있는 깊은 감수성을 배울 수 있다. 모든 욕망의 껍질들이 떨어져나가고 본질의 에너지가 변형되어 초월하는 경험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는 탄트라가 이끌어 줄 수 있는 세계를 요가도 충분히 이끌어 줄 수 있다. 이 점을 기억하라. 우리는 건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자연인(自然人)이 필요한 것이다. 자연인이 사는 세계에는 탄트라와 요가가 욕망을 초월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처럼 병든 사회에서는 요가도 탄트라도 그 어떤 것도 제구실을 할 수가 없다. 단지 그때 그때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처방전 역할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요가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억압하는 기술로 사용하기 위해 채택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탄트라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마음껏 정욕을 발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병든 마음에는 요가도 탄트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을 속이는 데 쓰이는 하나의 사기행각일 뿐이다. 그래서 건강한 마음, 특히 성적으로 건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는 요가와 탄트라 중 그대의 기호에 따라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이다. 물론 나는 지금 생물학적 구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 구분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기본적으로 남성의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공격적이고 외향적이며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요가가 적합하다. 그와 반대로 여성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 즉 수용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탄트라가 맞는 길이다. 그래서 탄트라에는 여신들이 많이 나온다. 어머니 칼리 여신, 타라 보살, 그리고 수많은 데비들과 바이라비들이 나온다. 그러나 요가에서는 여신의 이름은 취급도 하지 않는다. 요가에서는 남신들이 많이 나오고 탄트라에서는 여신들이 많이 나온다. 요가는 밖으로 분출하는 에너지이고 탄트라는 내면으로 흐르는 에너지이다. 그래서 심리학적 용어를 붙이자면 요가는 외향성이고 탄트라는 내향성이다. 그래서 각자의 성향에 맞게 길을 선택하면 된다. 그대의 성격이 내향성이라면 싸움은 그대에게 맞는 길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외향성이라면 그때 싸움이 그대에게 적격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마구 섞여 있다. 우리는 군중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개인이 아니다. 전부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요가가 그대를 들쑤셔 놓고 탄트라가 그대를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았다. 모든 약들이 그대의 병을 고친답시고는 새로운 부작용만 만들어 놓았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요가를 통해서 그대가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탄트라를 강조하는 이유는 탄트라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이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