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행복해지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 행복으로 가는 길은 없다. 행복이 길이다!
  • 행복을 따라가면 모든 게 따라온다
Osho/탄트라비전1

2. 호흡(呼吸), 우주에 이르는 다리

by 행복북카페 2021. 3. 6.

호흡(呼吸),
우주에 이르는 다리

Breath - a bridge to the universe

 

"진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는 미래에 성취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그대가 바로 진리이다."


시바가 대답한다.

 

 1 
빛의 샘(光源), 그 황홀한 일별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사이에서 찾을 수 있도다.

숨이 들어오고, 들어온 숨이 나가려고 하기 직전,
바로 거기에 지복(至福)이 깃들어 있도다.


 2 
숨은 들이쉴 때 아래(下丹田)에서 위(百會)로 반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내쉴 때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반원을 그린다.

이 두개의 회전점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그 자리를 깨달을지어다.

 

 3 
들이쉬고 내쉬는 그 찰나의 사이에 호흡은 에너지가 없으면서 또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대의 중심에 닿는도다.

 

 4 
숨을 완전히 내쉰 뒤 호흡이 멎었을 때,

또는 숨을 완전히 들이쉰 뒤 호흡이 멎었을 때,

호흡의 이 우주적인 멈춤 속에서 에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로다.

 

진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는 미래에 성취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그대가 바로 진리이다. 그래서 진리는 창조되거나 발명되는 것도 아니며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라. 그때 이 명상법들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마음은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은 언제나 뭔가를 찾고 구한다. 항상 마음은 미래의 어떤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바로 이 순간 속에서는 마음이 움직일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과거나 미래로밖에 움직일 수가 없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현재는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래서 마음과 진리는 결코 만날 수 없다. 

마음이 세속적인 목표를 추구할 때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리를 찾고자 할 때는 그 노력이 무의미하다. 오히려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빗나가게 된다. 진리는 지금 여기인데 마음은 늘 저기─미래나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대가 발견할 수는 있어도 진리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 찾는 노력이 바로 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진리를 찾을 때 그대는 현재로부터, 그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간다. 그것은 그대가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찾는 자'는 현재에 있고 ‘찾는 행위’는 미래에 있다. 그대는 찾는 것을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고 있다. 

 

“찾지 마라. 찾으면 잃을 것이다. 찾지 않으면 얻을 것이다.” 

시바가 말하는 명상의 모든 방편은 과거나 미래에서 떠도는 마음을 현재로 이끌어오는 방법이다.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은 이미 여기에 있다. 마음은 찾는 행위에서 찾지 않는 상태, 즉 무위의 상태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을 지적으로 해석하려면 더욱 어려워진다. 도대체 무슨 수로 마음을 그렇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마음은 다시금 ‘찾지 않는 상태', 즉 무위의 경지를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다시금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마음은 말한다. ‘찾지 마라' 그리고 나면 마음은 또 말한다. '나는 찾지 않아야 한다' 그때 ‘찾지 않는 상태'가 새로운 목표가 된다. 이리하여 찾는 행위는 또 시작된다. 욕망은 뒷문으로 다시 들어온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나, 비세속적인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나 찾는 행위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똑같은 마음의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목표는 세속적인 것이다. 찾는 행위 그 자체가 세속적인 것이기에. 

그러므로 세속적이지 않은 것은 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찾는 순간 그것은 세속적인 것이 된다. 그대가 신을 찾는다.면 신은 세속적인 것의 한 부분이다. 모크샤(解脫)를, 니르바나(星般)를 찾는다면 그것 역시 세속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대의 바람이 곧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르바나를 갈구해서는 안된다. 갈구가 끝난 상태가 니르바나이기 때문이다. 갈구가 끝난 상태를 갈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이것을 지적으로 이해하려면 하나의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시바는 이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명상의 방편만을 제시했다. 이 방편들은 결코 지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시바는 데비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진리는 여기에 있다. 찾지 마라. 그러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은 완전히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무책임한 말대신 그는 명상의 방편들을 주었다. 이 방편들을 실행하라. 그러면 마음의 방향이 전환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환은 결과이지 절대로 목적은 아니다. 전환은 어디까지나 부산물이다. 

그대가 한 가지 방편을 수행하게 되면 그대의 마음은 과거나 미래로 떠도는 것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대는 현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붓다가 방편을 이야기했고 노자와 크리슈나 역시 한결같이 방편을 이야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방편을 말하면서 지적인 개념을 동반시켰다. 그래서 불교 철학, 힌두 철학, 그리고 노장 철학이 생겨났다. 오직 시바만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바는 오직 명상의 테크닉만을 이야기했다. 거기에 어떤 지적 개념도 섞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가장 교활한 것이 마음임을. 속임수를 쓸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일단 마음과 연관되면 그것은 문제 거리로 변한다. ‘찾지 않는 상태’ 마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없앨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욕망이 없는 상태를 욕망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선가 영적인 격언, 즉 '욕망이 없으면 축복의 경지에 이르리라. 욕망이 없으면 그대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리라. 욕망이 없으면 고통마저 끝나리라.'라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이제 그들은 고통이 없는 경지를 얻으려고 갈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바람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지금 속임수를 쓰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갈망하는 상태에 있다. 단지 목표와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들은 이전에 돈과 명성, 부와 권력을 갈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될 수 있는 ‘갈망 없는 경지'를 갈망하고 있다. 갈망하는 행위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교활하게 위장하고 있다. 

따라서 시바는 어떠한 소개도, 서문도 붙이지 않고 바로 방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명상의 방편들을 수행한다면 그대의 마음은 현재로 돌아올 것이다. 마음이 현재로 돌아올 때 마음의 작용은 멈춘다. 그때 더 이상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떠다닐 수 없기 때문에 사념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속에는 사념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만약 그대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어떻게 마음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멈추어 버린다. 그때 그대는 마음 없음, 즉 무심(無心)을 얻는다.

그래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노력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노력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역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가 현재라고 하는 지점을 정해 놓는 순간 그 지점은 미래 속으로 이동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현재에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물을 때 그대는 또다시 미래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이 순간은 곧바로 물음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대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꿈꾸게 된다. 그대는 '언젠가 갈망도 없고 고통도 없는 경지에 머무를 수 있을 거야'라고 꿈꿀 것이다.그래서 그대는 또다시 '어떻게 하면 현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시바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방편만 주었을 뿐이다. 이 방편을 수행하게 되면 어느 날 불현듯 그대 자신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의 존재가 바로 진리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이며 니르바나이다. 

시바가 제일 먼저 꺼낸 방편들은 호흡에 관한 것들이다. 우선 호흡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자. 그 다음에 방편으로 들어가도 늦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계속 숨을 쉰다. 그래서 죽음을 '숨을 거두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삶과 호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모든 것이 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호흡이다. 호흡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계속된다. 

어린아이는 청년이 되고, 청년은 늙어서 노인이 된다. 그는 병에 걸리고 추해진다. 모든 것이 변한다. 그러나 호흡만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관계가 없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대가 그 언제라도 호흡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호흡이 멈춰진다면 그대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 호흡을 하는 데 그대가 계속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애를 써야 호흡이 가능하다면 그때는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호흡하려고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호흡할 수 있다. 그대의 영혼이 잠들어 있어도 호흡은 계속된다. 무의식 상태 속에서도, 깊은 혼수상태 속에서도 호흡은 계속된다. 호흡은 그대 자신도 모르게 계속되는 어떤 것이다. 

첫째로 호흡은 그대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그대의 본질을 구성하는 인자이다. 

둘째로 호흡은 삶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것이다. 호흡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 호흡과 삶은 동의어이다. 호흡은 삶의 메커니즘이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는 호흡을 프라나(prana)라고 부른다. 프라나에는 생명력과 활동력이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대의 삶은 그대의 호흡이다. 

셋째로 호흡은 그대와 그대 육체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호흡은 그대를 그대의 육체에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호흡은 또한 그대 자신과 우주 사이에서도 다리 역할을 한다. 육체는 그대에게 다가온 우주다. 육체는 그대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우주다. 

그대의 육체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육체 속에 있는 모든 것, 낱낱의 세포들이 곧 우주의 부분이다. 그리고 호흡은 그것들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다리가 부서지면 그대는 더 이상 육체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때는 더 이상 우주에 존재할 수 없다. 더 이상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그대에게 연결해주는 다리는 바로 호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호흡을 잘 다루면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 그대는 미지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호흡은 두 개의 극점을 갖고 있다. 한 극은 그대의 육체와 우주에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한 극은 그대의 존재와 초우주(超宇宙)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호흡의 한쪽 극만을 알고 있다. 호흡이 우주 속으로, 육체 속으로 이동하는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호흡은 육체로부터 비육체로도, 우주에서 초우주로도 이동한다. 우리는 호흡의 다른 이 극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이 극점을 알게 되면 그대의 차원은 변형된다.  

 

한편 시바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요가의 호흡이 아니라 탄트라의 호흡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가의 호흡법과 탄트라의 호흡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요가에서는 체계적인 호흡을 한다. 호흡을 체계화시키면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그때 호흡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며 그러면 그대의 수명은 더욱더 연장될 것이다. 더욱 그대는 강해질 것이며, 생명 에너지로 가득 찰 것이다. 더욱 젊어지고 싱싱해질 것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 탄트라는 호흡을 제어하고 체계화시키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저 그대의 내면으로 되돌아가는 방편으로써 호흡을 잠시 이용할 뿐이다. 따라서 탄트라에서는 호흡의 특별한 체계나 조절 따위를 수련해서는 안된다. 있는 그대로의 호흡 속에서 호흡의 또 다른 어떤 극점을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호흡에는 확실히 두 개의 극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극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호흡을 해왔고 앞으로도 호흡을 계속하며 살아갈 것이다. 호흡과 함께 태어나서 호흡과 함께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호흡의 이 두 극점을 전혀 모르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우주를 탐험했다. 인간은 달에도 갔다 왔다. 지금은 더 먼 별을 향해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 삶의 가장 가까운 부분인 호흡에 대한 탐험은 전혀 하지 않는다. 호흡 속에는 두 극점이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문이다. 다른 세계 속으로, 다른 존재 속으로, 다른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의 육체 속으로 들어온 문이다. 그리고 육체를 빠져나갈 때도 그 문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 문은 너무나 미묘하다. 

달을 관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달에 착륙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비행의 길이가 더 연장된 여행일 뿐이다. 고도의 과학기술과 정보만 있다면 더 먼 별까지도 갈 수 있다. 그러나 호흡은 가장 그대 가까이에 있다. 가까이에 있는 것일수록 관찰한다는 것이 더 어렵다. 분명할수록 더 어렵다. 그대와 너무나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와 호흡 사이에 어떤 간격도 없기 때문에 그대는 호흡을 관찰의 대상으로 놓고 보기가 힘들다. 오직 깊은 통찰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때만이 호흡의 두 극점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각성이 이들 방편의 기본이 된다.

자,그럼 각각의 방편으로 들어가자.

 


빛의 샘(光源), 그 황홀한 일별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사이에서 찾을 수 있도다.

숨이 들어오고, 들어온 숨이 나가려고 하기 직전, 

바로 거기에 지복(至福)이 깃들어 있도다.
RADIANT ONE, THIS EXPERIENCE MAY DAWN BETWEEN TWO BREATHS.
AFTER BREATH COMES IN (DOWN) AND JUST BEFORE TURNING UP (OUT) --
THE BENEFICENCE.

 

호흡이 들어온 뒤, 이것을 호흡의 하강점이라 한다 그리고 돌아나간 직후,  이것을 상승점이라 한다  거기에 지복이 깃들어 있다. 호흡이 들어올 때 주시하라. 그리고 호흡이 나갈 때 주시하라. 찰나와 같은 순간에 호흡의 정지 상태가 있다. 그 점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대가 그 점을 잡아내어야 한다. 

호흡이 들어오기 직전, 그리고 나가기 직전, 거기에 정지되는 순간이 있다. 그대가 그 순간을 잡을 때 깨달음이 가능하다. 그때 그대는 육체와 호흡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순간적으로 그 연결고리가 끊기는 것이다. 그때는 그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다. 이 점을 이해하라. 숨이 멈추는 상태는 그대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상태다. 하지만 그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호흡의 정지 순간을 한번도 인식해 본 적이 없다. 그 순간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내쉬는 숨은 죽음이요, 들이쉬는 숨은 탄생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그대는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다. 그 간격은 너무나 짧다. 하지만 그 간격은 반드시 존재한다. 오직 성실하게 주시하는 자만이 그 간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시바가 말하는 ‘지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호흡법을 수련하지는 말라. 호흡을 조절해서는 결코 그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그 상태를 그대로 두라. 완전한 주시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만이 가능하다. 그대가 조금이라도 의도적인 면이 있다면 거기에 왜곡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대는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호흡의 방편이 왜 이렇게 간단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간단한 방편을 통해서 무슨 대단한 명상을 하며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불생과 불멸을 아는 것이다. 그대가 관념적으로 아는 것과 정지의 순간을 잡아내는 것과는 질적으로 틀리다. 그대가 관념적으로 아는 것은 결코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안다는 말은 진리를 체험한다는 말이다. 말을 통해서, 사념을 통해서 아는 것은 그저 상상일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확신도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 정지 간격을 잡아내기 위해 모든 주의를 다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노력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주의를 기울여라. 그러나 어떤 행위도 개입시키지는 말라. 의식의 분명한 각성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이미 거기에 갖추어져 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숨이 들어오고 나오는 것만 살펴라. 그 들락날락하는 통행만을 주시하라. 공기가 그대의 콧구멍에 닿는 감촉을 느껴 보라. 그 숨과 함께 단전으로 내려가라. 완전히 깨어 있는 중에 호흡과 함께 다녀야 할 것이다. 결코 호흡을 놓쳐서는 안된다. 앞서가지도 말고 뒤따라가지도 말라. 오직 호흡 그 자체가 되어 호흡과 동시에 존재하라. 

호흡과 의식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호흡이 들어올 때 그대도 들어오라. 그렇게 할 때만이 그대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존재하는 정지 간격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숨과 함께 들어가고 숨과 함께 나와라. 들어가고 나가고, 들어가고 나가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속에서, 붓다는 특히 이 방편을 사용했다. 그것은 대표적인 불교 명상법의 하나로 알려져있다. 바로 아나빠나사티(Anapanasati)라는 것이다. 불교에는 대표되는 몇 가지 명상법이 있다. 그중에서도 남방불교, 혹은 소승불교라고 불리는 국가들, 즉 스리랑카, 태국, 버어마 등지의 불교 수행승들은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이 방편을 포함한 자신들의 수행법을 비파사나(Vipasana) 명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붓다의 마지막 깨달음에 대한 체험은 바로 이 방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구도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이런 저런 명상의 방편을 통해 그 목표에 이른다. 그리고 그 모든 방편들은 시바가 말하는 112가지 방편 속에 다 들어 있다.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 속에 말이다. 

한편 비그야나의 방편 가운데 첫번째가 불교의 명상 방편이다. 그것은 붓다가 이 방편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호흡을 집중하라. 들어오고 나가는 그 호흡을 지켜보라."

그러나 붓다는 한번도 두 호흡 사이의 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또한 정지 간격에만 집중하다보면 의식의 각성 상태에 혼란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만 말했다. 

 

“호흡을 알라. 호흡이 들어올 때 그대 자신도 함께 들어오라. 호흡이 나갈 때 그대 자신도 호흡과 함께 나가라.” 

붓다는 결코 이 방편의 뒷부분, 즉 정지 간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붓다는 보통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이 정지 간격을 말하면 그들의 마음에는 그 정지 간격을 발견하려는 적극적인 욕망이 생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의식의 각성에 장애물이 된다. 정지 간격에 이르려는 욕망의 바람이 불 때 그대는 앞으로 전진한다. 호흡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대는 호흡을 앞질러 간다. 호흡보다는 정지 간격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아예 그런 정지 간격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대가 관념적으로만 붓다의 호흡법을 알고 있으면 그것은 절반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실제로 실행을 해보면 그 절반은 자동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붓다가 말한 대로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날 그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정지 간격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대의 각성이 예리하고 깊게 되면 그 각성은 하나로 묶여질 것이다. 이때 불현듯 호흡이 정지된 그 사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순간적으로 호흡과 함께 움직일 때 거기에 호흡이 없다면 어떻게 무자각의 상태로 처져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 그대는 알 것이다. 호흡이 텅 빈 상태를 깨닫게 될 것이다. 호흡의 핵심이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이제 호흡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순간을 지복이라 하는 것이다.

이 하나의 방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아시아의 전지역이 수천 년 동안 이 방편과 더불어 살아왔다. 티벳, 중국, 일본, 버마, 태국, 스리랑카 등등…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전지역이 이 방편을 수련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방편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의 첫번째 방편이 붓다의 이름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고의적으로 이 방편을 회피해 왔다. 이 방편이 점점 불교의 방편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는 이 방편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또한 힌두교도들이 이 방편을 회피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시바에 의해서 서술된 이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가 불교도들에 의해서 불교의 명상비전(冥想秘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편들은 불교의 것도 힌두교의 것도 아니다. 방편은 단순한 하나의 과학이며 원리일 뿐 그 누구에게도 속한 것이 아니다. 붓다는 이 방편을 사용했고, 붓다 이전부터 이 방편은 사용되었다. 단지 붓다는 이 방편을 통해서 깨달은 자, 즉 붓다(Buddha)가 되었다. 이 방편은 다른 방편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고 쉽다.

2

숨을 들이쉴 때 아래(下丹田)에서 위(白會)로 반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내쉴 때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반원을 그린다. 이 두 개의 회전점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그 자리를 깨달을지어다.
AS BREATH TURNS FROM DOWN TO UP, AND AGAIN AS BREATH CURVES
FROM UP TO DOWN -- THROUGH BOTH THESE TURNS, REALIZE.

 

 

이 방편은 앞의 방법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다. 강조하는 부분이 정지 간격이 아니라 두 호흡 사이의 회전점이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은 하나의 원을 만든다. 기억하라. 호흡은 절대 평행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호흡을 평행선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원을 그린다. 들어오면서 반을 그리고 나가면서 나머지 반을 그린다. Breath going in is half the circle; breath going out is the other half of the circle. So understand this: first, breathing in and out creates a circle. 

첫째, 호흡은 원형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이해하라. 두 개의 평행선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하나의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면서 완전한 원을 그리는 것이다. 들어오는 숨은 내부의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반원으로 돌아서 나가는 숨이 된다. 또 나간 숨이 밖의 어느 지점에서 반원으로 회전하여 들어오는 숨이 된다. 

그러면 왜 호흡은 회전하는가? 그것은 자동차 기어의 원리와 같다. 그대가 기어를 바꿀 때마다 중립기어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호흡 역시 중립기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호흡의 회전점이다. 이 회전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호흡이 바로 들어가고 나가고 할 수 없다. 

이 중립지대에서는 그대가 육체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다.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다. 물질적인 것은 그대 존재의 기어이며 정신적인 것 역시 또 하나의 기어이다. 하지만 그대가 중립기어일 때 그대는 육체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다. 단지 존재 그 자체라는 말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의 중립기어를 말이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를 말이다. 


이 때문에 호흡의 회전점이 강조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이다. 그것은 거의 완벽한 기계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수많은 기어 장치들이 있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의 메커니즘을 모르고 있다. 아니 모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알고 나면 미칠 것이다. 인간의 이 기계 장치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의 이 기계 장치를 가지고 공장을 세운다면 10평방 킬로미터가 넘는 땅이 필요하며 256평방 킬로미터의 땅이 이 기계의 소음으로 진동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대의 몸은 7천만 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뇌세포의 수만 해도 200만 개가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세포들이 아주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다. 순간 순간마다 또한 이 기계 장치들은 가동되고 있다. 이 기계 장치는 완전무결하다. 여기의 이 방편은 그대 마음의 기계 장치와 몸의 기계 장치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대의 본질은 기계 장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그대의 존재는 메커니즘의 일부가 아니다. 그리고 기어를 바꾸는 순간마다 깨달음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잠잘 때 그대는 기어를 바꾼다. 낮에는 일하기 위해 다른 기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잠자는 것 역시 또 다른 마음의 기능이다. 일할 때와 잠잘 때 그 사이가 중요하다. 거기에 간격이, 회전점이, 중립기어가 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그대는 또 기어를 바꾸게 된다. 하루 중에도 이 기어는 여러 번 바뀐다. 예를 들어 그대가 조용히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그대를 화나게 한다. 그와 동시에 그대는 또 다른 기어로 바꾼다. 

화를 내게 되면 호흡의 리듬이 빨라진다. 호흡은 자극을 받아 떨리고 숨이 막히게 된다. 그대의 몸은 뭔가를 때려부수고 싶어진다. 뭔가가 박살이 나야 비로소 그 답답함이 풀리고 호흡은 다시 안정을 되찾는다. 호흡이 바뀌고 그대의 몸은 전혀 다른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결국에는 그대 자신이 다른 인간으로 변한다. 

예를 들어 차가 있다. 차에 엔진을 걸어놓고 기어를 중립 상태에 두면서 계속 가속 페달을 밟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차는 떨리면서 과열될 것이다. 그대가 화가 나는 것을 참으려 할 때 과열되는 것도 이런 원리이다. 그대의 기계 장치는 분노로 과열되었는데 그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열이 나게 되는 것이다. 그대의 몸은 기계다. 물론 그대 자신은 ‘그 이상' 이다. 그리고 '그 이상'을 그대는 반드시 발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기어가 바뀔 때 회전점에서 ‘그 이상'을 발견하라. 이 회전점은 극히 짧은 순간이기 때문에 매우 세심한 관찰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관찰력이 없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어떤 것도 관찰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이 꽃을 관찰하라. 그대에게 주는 이 꽃을 관찰하라.'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이 꽃을 도저히 관찰할 수 없다. 잠시 동안 그 꽃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아름다움과 연결된 또 다른 생각으로 옮겨다닐 것이다. 이제 꽃은 더 이상 그대의 관찰 대상이 아니다. 그대의 시각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붉다. 이것은 푸르다. 이것은 희다.”

 

그런 다음 그 색깔에 연결된 다른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것은 관찰이 아니다. 관찰 속에는 언어가 개입되지 않는다. 언어는 개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을 유발한다. 하지만 진정한 관찰은 언어적인 개념도 없고 감정의 어떤 움직임도 없는 상태 속에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꽃은 그대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꽃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다. 그대와 하나가 되어 있기에 거기에 홀로 남아 있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3분 동안만 마음의 어떤 움직임도 없이 완전하게 꽃과 함께 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여기 차원의 변형이 온다. 지복의 순간이 온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관찰자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각성되지 못했기에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여기저기로 원숭이처럼 건너뛰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다. 원숭이로부터 말이다. 우리의 마음은 원숭이처럼 작용한다. 원숭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여기저기로 뛰어다니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어떤 행위도 하지 말고 그저 앉아만 있으라.'라고 말했다. 그때 원숭이 같은 마음은 더 이상 날뛸 수가 없다. 

선가(禪家)에서는 좌선(坐禪)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좌선은 '어떤 행위도 하지 말고 그저 앉아만 있으라.'라는 뜻이다. 전혀 움직이지 말고 돌부처처럼 죽은 듯이 앉아 있으라는 뜻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 두 호흡 사이의 회전점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대는 궁극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육체와 마음을 넘어서서 그대 자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왜 그토록 이 회전점이 중요한 것인가? 이 회전점은 육체와 마음으로부터 그대를 분리시켜 다른 차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Why are these turnings so important? They are important because on turning, the breath leaves you to move in a different direction. 

 

호흡은 그대와 함께 육체 차원으로 들어왔다가 그대와 함께 마음의 차원으로 나간다. 하지만 호흡의 두 회전점에서는 호흡이 그대와 함께하지 않는다. 회전점에 이르는 순간 그대는 호흡과 분리된다. 그 순간에는 호흡이 삶이라면 그대는 죽음이고, 호흡이 육체라면 그대는 비육체이며, 호흡이 마음이라면 그대는 무심이다. 

호흡이 멈춰지면 마음의 작용도 따라서 멈춰진다. 왜 그런가?호흡이 멈춤과 동시에 마음은 호흡에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호흡은 육체와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호흡의 정지는 그대 자신으로부터 몸과 마음의 분리를 뜻한다. 기어가 중립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차가 서 있다. 그러나 차의 엔진은 달리고 있다. 그 엔진은 매우 요란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기어가 들어가지 않았다. 차체와 엔진이 연결되지 않은 것이다. 이때 차는 두 개로 분리된다. 움직이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만 엔진과 차체가 분리된 것이다. 

호흡이 회전점을 지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그대는 호흡과 분리된다. 그 순간 그대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깨닫기 쉽다. 이 존재가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육체 속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단지 기계 장치일 뿐인가? 아니면 이 기계 장치를 통제하는 그 무엇인가? 호흡 사이에 있는 회전점에 지복이 깃들어 있다고 시바는 말한다. '이 회전점을 깨달아라. 그리하면 그대의 영혼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리라.'라고 시바는 외치고 있다. 

 3 

들이쉬고 내쉬는 그 찰나의 사이에 호흡은 에너지가
없으
면서 또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대의 중심에 닿는도다.

The third technique:

OR, WHENEVER IN-BREATH AND OUT-BREATH FUSE, 
AT THIS INSTANT TOUCH THE ENERGY-LESS, ENERGY-FILLED CENTER


우리는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어져 있다. 육체는 주변이다. 우리는 육체를 안다. 우리는 주변을 안다. 그러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이 한 점에서 만날 때, 그것을 들이쉬는 숨이나 나가는 숨이라고 지적할 수 없을 때, 거기에 침묵의 순간이 있다. 호흡이 나가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는 그 순간이 있는 것이다. 호흡이 나갈 때는 다이나믹하다. 들어올 때 역시 다이나믹하다. 그러나 들어오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을 때 거기에 침묵이 흐른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이를 수 있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의 결합 지점이 그대의 중심이다. 

그러면 들어온 숨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그대의 중심으로 간다. 그리고 중심에 가 닿는다. 나가는 숨 역시 그대의 중심에서 나간다. 따라서 도교(道敎)나 선가(禪家)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중심은 머리에 있지 않고 아랫배(丹田)에 있다.”

 

호흡은 단전으로 내려가서 그대의 중심을 건드린 다음 다시 밖으로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호흡은 그대의 중심과 몸을 잇는 다리다. 그대는 자신의 몸을 안다. 하지만 중심이 어디인지는 모르고 있다. 호흡은 본래 중심에까지 갔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한 호흡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의 경우 호흡은 중심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항상 뭔가 불안하며 허영심에 들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잠자는 것을 보라. 아이의 호흡을 관찰하라.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나온다. 그리고 호흡이 나가면 배가 들어간다. 호흡하는 데 가슴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직 배만 움직인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중심에 있다. 그들이 그토록 행복해하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피곤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언제나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다. 

어린아이가 화를 낼 때는 100퍼센트 화를 낼 수 있다. 이때 아이의 분노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대가 완전히 분노할 때 그 분노는 아름다움을 갖는다. 전체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100퍼센트 분노할 수 없고 따라서 아름다울 수도 없다. 그대는 부분적이며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대는 추하다. 부분적인 것은 언제나 추하기 때문이다. 분노 뿐만 아니라 사랑조차 추할 것이다. 사랑 속에서도 그대는 사랑 자체가 되지 못하고 부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계산하는 한 결코 그대는 전체적으로 되지 못한다. 그대가 사랑을 할 때 거울을 통해 그대의 얼굴을 한번 보라. 헐떡거리는 추한 짐승이 거기에 있다. 왜? 무엇 때문에 사랑 속에서조차 추한가? 그대의 사랑 역시 또 하나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서로 뭔가를 얻으려고만 할 뿐 그대 자신을 전체적으로 내맡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분노 속에서조차 전체가 된다. 그의 얼굴은 빛나고 아름답다. 그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의 분노는 과거와 연관되어 있지 않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계산하지 않는다. 단지 분노할 뿐이다. 그는 그의 중심에 있다. 따라서 그대가 그대의 중심에 있을 때 그대는 전체적으로 될 수 있다. 그대가 무슨 행동을 하건 그것은 전체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거기에 분열이 없다. 그러나 그대가 중심에서 벗어날 때 그대의 모든 행동은 부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전체를 반대한다. 따라서 그대가 분열될 때 추함이 생겨난다. 

한때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자라면서 어떻게 해서 호흡이 얕아졌는가? 이제 우리의 호흡은 결코 단전에까지 이르지못한다. 하지만 호흡은 몸 아래로 내려갈수록 깊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호흡은 겨우 가슴에 가 닿고는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러므로 결코 저 중심에 이르지 못한다. 그대는 이 중심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 중심에 이르는 순간 그대는 전체가 되기 때문이다. 부분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그대의 기계 장치가, 호흡이 부분으로 바뀌어야 한다. 중심으로부터 호흡한다면 그대는 그 속에서 전체가 되어 넘칠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두려워하고 있다. 이 무제한적인 개방을, 타인을 향한 이 무한한 열림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대의 연인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대는 두려워하고 있다. 거기에는 믿을 수 없는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완전히 열어젖힌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대도 모른다. 그래서 그대는 두려워한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깊게 호흡할 수 없다. 호흡이 중심에 닿을 수 있을 만큼 깊이 숨쉬지 못한다. 호흡이 중심에 이르면 그대의 행동은 전체가 되어 더 이상 계산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의 전체적인 상태를 두려워하는 만큼 그대는 깊게 호흡하지 못한다. 최대한의 호흡이 아니라 최소한의 호흡을 하고 산다. 그대의 삶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최소한으로 호흡하면서 사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목숨만 연명하는 것이다. 최대한으로 호흡할 때 비로소 삶은 활기에 넘친다. 그러나 사회의 관습은 그런 그대를 가만히 두지 못한다. 이 사회 속에서 그렇게 살기란 정말로 어렵다. 삶의 에너지가 넘쳐흐르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남편으로 아내로 머물 수가 없다. 

삶이 흘러 넘칠 때 사랑 역시 흘러 넘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모든 차원으로 흐르며 어떤 것 하나에 매일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위험을 느낀다. 따라서 그대는 활기차게 사는 것을 원치 않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죽어 있는 정도가 클수록 그대는 안전함을 느낀다. 그대의 생명 에너지가 적으면 적을수록 자신을 통제하기가 쉽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 그대는 자신을 영적 스승이라고 내세운다. 그대의 분노와, 그대의 사랑과, 그대의 모든 감정을 그대가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그대가 최소의 에너지로 살아갈 때만이 가능하다. 

모든 사람은 이따금씩 갑자기 자신의 에너지가 최소한의 상태에서 최대한의 상태로 바뀌는 것을 느낀다. 산을 오르거나 교외로 빠져나가거나 혹은 감옥에서 나올 때 특히 그렇다. 산봉우리 위에 올라갔을 때 저 끝없는 하늘이며 펼쳐진 푸른 숲과 손으로 잡을 것만 같은 구름을 마주 대할 때 우리는 심호흡을 하게 된다. 그대의 에너지가 최소한의 차원에서 최대한의 차원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산에 올라갔기 때문이 아니라 심호흡을 했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할 때 그대는 '아, 아’ 소리를 내게 되는데 이때 호흡은 그대의 중심에 닿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복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지복은 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중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실 복잡한 도시 속에서 그대는 두려웠다. 가는 곳마다 타인이 있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을 억눌러야만 했다. 소리도 지를 수 없고 마음껏 춤도 출 수 없었다. 마음껏 목청을 돋구어 노래를 하거나 큰소리로 웃을 수조차 없었다. 왜인가? 두렵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경찰이 나타나 그대를 잡아갈지 모른다. 점잖은 옷을 입은 성직자나 도덕군자가 나타나서 그대를 꾸짖을지 모른다. 온통 그대를 둘러싼 감시의 눈초리 때문에 그대는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버트란드 러셀은 그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명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서야 그 문명을 이룩했다.”

길거리에서는 춤출 수 없지만 산 위에 올라가서는 마음대로 춤추고 노래할 수 있다. 하늘과 함께 그대는 혼자일 수 있다. 하늘은 그대를 구속하지 않는다. 하늘은 끝없이 열려 있다.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 그대가 한 심호흡은 그대의 중심을 울리고 그와 동시에 지복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일 뿐 산꼭대기의 지복은 곧 사라지고 만다. 

걱정은 어김없이 그대에게 다시 밀려오기 시작한다. 아내나 남편, 자식이나 부모를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는 산에 오르자마자 내려갈 생각부터 먼저 한다. 그대는 다시 주변으로 되돌아왔다. 조금 전에 했던 심호흡은 그대가 의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단지 생리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상황이 바뀌게 되면 기어가 바뀌기 때문이다. 만약 새로운 상황이 펼쳐진다면 그대는 이전에 하던 식으로 숨쉴 수 없다. 새로운 호흡이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그대의 중심에 가서 닿는다. 그리고 그대는 지복을 느낀다. 

시바는 말한다. '그대는 매순간마다 그대의 중심에 닿아야 한다'고, '그대의 호흡이 중심에 닿지 않는다면 그대 스스로 그 중심에 닿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깊게 그리고 고요하게 호흡하라. 그대의 중심에 숨결이 가 닿도록 천천히 그리고 깊게 호흡하라. Take deep, slow breaths. Touch the center. 가슴으로 하지 말고 아랫배로 하라. 가슴으로 하는 호흡은 속임수이다. 문명, 교육, 도덕 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하여금 가슴으로 호흡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대는 자신의 중심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깊은 호흡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섹스에 대한 억압을 그만두지 않는 한 결코 진정한 호흡을 할 수 없다. 호흡이 아랫배 깊숙이 들어가면 호흡은 성(性)센터에 에너지를 준다. 그리고 성 센터를 자극시킨다. 이때 성 센터는 생기가 넘쳐나면서 활성화된다. 그런데 문명은 섹스를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성기를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그것을 만지며 노는 것을 보면 우리는 당장 이렇게 소리지른다.

 

"안돼! 그만두지 못해!”

 

어른에게 꾸중을 듣기 전과 듣고 난 뒤에 아이의 호흡을 관찰해 보라. 꾸중을 듣고 난 뒤에는 그의 호흡이 대번에 얕아져 있다. 사실 성기를 만지고 있는 것은 그의 손만이 아니다. 그 자신의 호흡 역시 성기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호흡이 성기에 가 닿게 되면 만지는 손을 멈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손이 만짐을 멈추게 되면 호흡도 따라서 성기에 닿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호흡을 깊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을 두려워한다. 몸의 아래 부분은 신체적으로도 아래 부분일 뿐만 아니라 가치도 낮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저질(低質)로 비난받고 있다. 그러므로 호흡이 이 아래 부분에까지 내려가지 못하도록 얕은 호흡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호흡이란 아랫배까지 깊숙이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군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모든 기계 장치를 바꿔야 한다. 오직 위쪽, 즉 머리 쪽으로만 호흡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혀 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성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호흡의 체계를 바꿔야 한다. 호흡은 머리 속으로, 사하스라라(sahasrara) 챠크라 쪽으로 올라가서는 다시 입으로 돌아와야 한다. 입에서 사하스라라까지가 호흡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숨결이 아랫배로 내려가서는 절대 안된다. 아랫배 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대의 섹스 에너지가 깨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호흡이 깊게 내려갈수록 그대는 중심을 향해 가게 되며 중심은 성 센터 부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은 곧 삶이기에 그대의 중심은 성 센터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호흡은 위쪽으로부터 아래쪽으로의 삶이며 성은 아래쪽으로부터 위쪽으로 흐르는 삶이다. 섹스 에너지도 흐르고 있고 호흡 에너지도 흐르고 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호흡 에너지는 상체에서 흐르고 있고 섹스 에너지는 하체 쪽에서 흐른다는 점이다. 이 둘이 만나서 삶이 창조된다. 그러나 성을 두려워한다면 이 둘을 만나지 못하게 하라.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문명인은 거세(去勢)된 인간이다. 우리가 호흡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이 명상의 방편들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명의 에너지로부터 거세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시바는 여기에서 '에너지가 없으면서 에너지로 가득 찬'이라는 모순적인 말을 쓰고 있다. 사실 중심에는 에너지가 없다. 그대의 몸과 마음으로는 거기에 어떤 에너지도 공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에너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그대의 몸이나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우주적인 근원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육체 에너지는 연료 에너지의 일종이다. 그것은 휘발유에 지나지 않는다. 음식을 먹게 되면 그것은 체내에서 연소성 에너지로 바뀐다. 그리하여 산소와 결합하면서 에너지를 내뿜는 것이다. 그래서 약 석 달 동안 음식을 공급하지 않으면 육체는 에너지 고갈로 인해 죽는다. 그리고 그 석 달이란 기간은 비상용으로 미리 비축해 둔 에너지가 모두 고갈될 때까지의 기간이다. 

그러나 그대의 중심에는 이런 연료용 에너지가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시바는 ‘에너지가 없으면서'라고 말했다. 그것은 음식물의 섭취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것은 우주적인 근원에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우주적인 에너지이다. 때문에 시바는 '에너지가 없으면서 또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대의 중심'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이 만나는 그 순간, 바로 그 지점이 그대의 중심이다. 이것을 자각하는 순간 바로 거기에 깨달음이 존재한다. 깨달음이 말이다. The moment you can feel the center from where breath goes out or comes in, the very point where the breaths fuse -- that center -- if you become aware of it, then enlightenment. 

 4 
숨을 완전히 내쉰 뒤 멈춰지는 순간에,
또는 숨을 완전히 들이쉰 뒤 멈춰지는 순간에,
호흡의 이 우주적인 멈춤 속에서 에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힘든일이로다.

 

이 방편을 모든 사람에게 권하기는 어렵다. 시바도 '이것은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순수하지 못한 사람인가? 그는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대는 이 방편을 수련할 수 없다. 하지만 때때로 방편의 경지를 느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그대가 차를 운전하다가 교통사고가 나려는 순간 그대의 호흡이 멈춘다. 숨을 내쉰 상태라면 내쉰 상태 그대로 있을 것이며, 숨을 들이킨 상태라면 들이킨 상태 그대로 있을 것이다. 위급할 때에는 호흡이 중지된다. 사념도 중지된다. 모든 것이 중지된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실 그대의 에고는 일상적인 대용물일 뿐이다. 위급할 때는 이 에고를 전혀 기억할 수 없다. 그대의 명성과 자존심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 다른 차가 와서 그대의 차를 받는 순간 그대는 죽음 바로 곁에 있다. 그리고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조차 그 순간에는 호흡이 멈춘다. 여기에 우주적인 멈춤이 있다. 그대는 그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대는 중심에 이를 수 있다. 

이 방편은 특히 선승(禪僧)들에 의해서 많이 사용되었다. 선승들의 명상 방법이 그토록 괴상하고 낯설어 보이는 것은 그들이 이 방편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위들을 한다. 아무 이유도 없이 선사(禪師)는 갑자기 제자의 등을 후려갈긴다. 

그대는 선사 앞에 앉아 있다. 이야기가 화기애애하게 풀리고 있다. 그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선사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대의 따귀를 갈긴다. 그대는 경악하게 되고 순간 그대의 호흡이 멈추어 버린다. 만일 맞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이 멈춤의 상태는 불가능하다. 선사에게 욕을 했다면 맞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맞으면서 그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선사를 욕했다. 그래서 선사는 나를 때리고 있다.' 그대는 이미 맞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간격이 없다. 하지만 그대가 욕을 했다고 해서 선사가 그대를 때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배꼽이 빠지도록 웃을 것이다. 그때 역시 그대의 호흡은 멈춘다. 그대는 선사를 비난하고 모독했다. 따라서 틀림없이 선사는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대의 예상과는 달리 선사는 웃기 시작한다. 웃을 뿐만 아니라 덩실덩실 춤까지 춘다. 이 해괴망측한 상황에서 그대는 돌연 호흡의 멈춤 상태가 일어난다. 그대는 선사의 이런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대의 마음은 멈춘다. 마음이 멈출 때 호흡도 멈춘다. 그리고 호흡이 멈추면 마음도 멈춘다. 

그대는 평소에 선사를 존경해 왔다. 그대의 마음은 스승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은 스승에게 나의 마음을 표시할 때다. 나는 절을 할 것이다.' 그대가 절을 하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스승은 주장자로 인정사정없이 그대를 후려칠 것이다. 선사들은 원래 인정사정없는 사람들이다. 그대는 도저히 그런 스승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왜 때리는가? 이때 그대의 마음은 정지된다. 이것이 우주적인 멈춤의 상태이다. 만일 그대가 이 방편을 충분히 이용한다면 그대는 자신의 본래 면목을 깨달을 수 있다.  

스승으로부터 갑자기 얻어맞아서 깨달음을 얻은 많은 사례들이 있다. 사실 그대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 어떻게 두들겨 맞아서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대를 죽일지라도 그대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이 방편을 이해한다면 선사들이 왜 갑자기 제자를 후려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 행렬이 시가지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시바의 결혼 행렬을 보려고 달려갔다. 결혼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마리화나에 취해 있었다. 사실 마리화나와 L.S.D.의 복용은 시바의 결혼 행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시바는 알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도 역시 알고 있었다. ‘소마 라사(Soma Rasa)'라 불리는 이 마리화나의 무한한 황홀경을 말이다. 알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가 그의 저서 '신나는 신세계'에서 이 마리화나를 '소마(Soma)’라고 부른 것은 시바에게 배운 것이다. 시바의 일행은 제멋대로 춤추고 노래부르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그리하여 시가지 전체는 그들 눈앞에서 사라지고 오직 우주적인 이 호흡의 멈춤 상태만이 나타났다.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사건이 마음의 상태가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호흡의 멈춤 상태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갑작스런 사건이 필요치 않다. 순수한 사람들은 언제나 쉽게 그 상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들은 헛된 욕망이나 환상을 꿈꾸지 않기에 그저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때 호흡은 문득 멈출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호흡이 움직여야 마음도 움직인다는 것을. 마음이 빨리 움직일 때,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빨리 일어나고 사라질 때, 그때 호흡 역시 빨라진다. 고대 인도의 의학서인 아유르베다(Ayurveda)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행위를 너무 자주 하면 생명이 단축된다.”

 

이 말은 성행위를 할 때 사람들은 흥분하게 되고 그 흥분이 호흡을 빨라지게 해서 삶이 단축된다는 뜻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호흡의 개수를 갖고 나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이렇게 말한다. 

 

“성행위는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긴장을 풀어준다. 따라서 성을 억누르게 되면 심장 장애가 일어난다.”

이 주장도 옳다. 동시에 아유르베다의 주장도 옳다. 이 둘의 주장이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사실 아유르베다는 5천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심한 육체 노동을 하고 있었다. 삶 그 자체가 노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부러 긴장을 풀 필요가 없었다.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따로 인위적인 방법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노동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오직 섹스만이 그와 같은 노동의 효과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현대의학의 주장이 현대인들에게는 맞는 말이다.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문명의 이기 덕분에 신체적 노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섹스를 통해서 신체적 노동의 부족을 메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섹스를 통해서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뛸 것이며 혈액순환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리고 호흡은 중심에 까지 깊이 내려갈 것이다. 이 때문에 섹스를 하고 난 뒤에는 이완을 느끼게 되며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섹스는 가장 좋은 진정제’라고 한 프로이드의 말은 현대인에게 가장 맞는 말이다. 

섹스 속에서 그대의 호흡은 빨라진다. 분노 속에서도 역시 빨라진다. 그러나 마음의 상태가 순수할 때, 욕망도 바람도 동기도 없을 때 더 이상 그대는 헤매고 다닐 필요가 없다. 그대는 '지금 여기에' 머물 것이다. 마치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연못처럼 말이다. 바로 이때 호흡은 자동적으로 멈춘다. 그때 에고는 사라진다. 그대는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다. 우주가 그대 자신이 될 것이다. 


The deceptions of the mind

〈질문 >

“호흡의 과정 중에 멈춤이 일어나는 그 특별한 지점을 단지 인식한다고 해서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단지 짧은 순간에 그 간격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과연 의식 전체에 
각성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Question 1
HOW IS IT POSSIBLE THAT BY SIMPLY BECOMING AWARE AT A PARTICULAR POINT IN THE BREATHING PROCESS ONE CAN ATTAIN ENLIGHTENMENT? HOW IT IS POSSIBLE TO BECOME FREE FROM THE UNCONSCIOUS BY JUST BEING AWARE OF SUCH A SMALL AND MOMENTARY GAP IN THE BREATHING?

 

 

이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의문이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로 사람들은 영적인 성취는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어렵지도 않고 또 그대가 새롭게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대가 누구이든지 이미 그대는 영적인 것을 지니고 있으며 그대의 존재에 덧붙여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대의 존재에서 가려내어야 할 것이 없다. 그대는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을 만큼 완벽하다. 미래의 언젠가에 완벽해진다는 말도 아니다. 그대 자신이 되기 위해서 어려운 일들을 통과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어떤 다른 곳으로 갈 필요도 없다. 이미 그대는 거기에 있다. 성취해야 할 것은 이미 거기에 갖추어져 있다. 이 점을 그대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때 그대는 왜 그토록 간단한 방편들이 그대를 도울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영적인 것이 어떤 성취라면 그때는 일이 어렵게 될 것이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만약 그대가 영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대는 절대 영적으로 될 수 없다. 영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 만약 본래부터 그대에게 신성이 없다면 그때는 가능성이 없다. 다른 방법도 없다. 그대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더라도 헛수고이다. 신성이 없는 사람은 신성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성취하고자 원하던 것이 바로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대 자신이다. 그대는 이미 거기에 있다. 갈망의 끝이 이미 그대의 존재 속에 현존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 이 순간에 신성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그대이다. 궁극적인 존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토록 간단한 방편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아주 작은 것 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옷과 같다. 그대의 육체는 여기에 있으며 또한 옷 속에 숨겨져 있다. 같은 방식으로 그대의 영성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대의 어떤 옷 속에 숨어 있다. 이 옷이 바로 그대의 인격이란 것이다. 그대는 지금 당장 여기에서 벌거벗을 수 있다. 그대의 영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대는 옷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그 옷 속에 그대가 숨는지도 그대는 모른다. 따라서 어떻게 옷을 벗는지도 모른다. 그대는 오랜 세월을, 아니 수많은 생을 옷을 벗지 않고 살아왔다. 그리고는 그 옷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대 자신을 잃어버렸다. 이 옷들이 그대가 되었고 이것이 자신을 발견하는 데 유일한 장벽이 된다. 

예를 들면 그대가 어떤 보물을 갖고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대는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혹은 그것이 보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는 계속 거리에 나가 구걸을 하고 있다. 그대는 이제 한 사람의 걸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서 당신의 집 안을 뒤져 보시오, 거지처럼 살 필요가 없을 거요. 당신은 그 순간 황제가 될 수도 있소.'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러면 거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하시오? 내가 어떻게 순식간에 황제가 된단 말이오? 나는 수많은 생을 거지로 구걸해 왔소. 나는 황제가 될 수 없소. 그러니 당신의 말은 정말로 우습기 짝이 없소.” 

그것은 불가능하다. 거지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 왜인가? 거지의 마음은 오래된 습관이기 때문이다. 보물이 집 안에 파묻혀 있다면 단지 파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즉시로 그는 거부가 될 수 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감추어진 보물이다. 미래 어디에선가 성취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대 속에 들어있다. 그대가 바로 보물이다. 그러나 그대는 계속 구걸행위를 한다. 

그래서 간단한 방편으로도 그대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땅을 파 보아라. 조금만 수고를 하면 그대는 금방 황제가 될 수 있다. 그대는 보물을 덮고 있는 약간의 흙만을 걷어 내면 된다. 내가 이 말을 할 때 그것은 상징적인 뜻이 담겨 있다. 내가 흙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의 옷을 말한다. 그대가 약간만이라도 옷을 벗을 수 있다면, 그대가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생각해 왔던 겉치레를 벗을 수 있다면 그대는 보물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날 것이다. '호흡을 인식한다는 이토록 간단하고 보잘것없는 방편을 통해서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하다. 그대와 붓다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점밖에 없다. 그대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고 붓다는 발견했다. 오직 이 차이뿐이다. 비논리적으로 보이는가? 붓다.와 그대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은 무한하게 보인다. 도저히 그대는 붓다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 같다. 그것은 거지와 황제의 간격보다 더 크다. 그러나 거지는 즉시 황제가 될 수있다. 보물이 이미 거기에 묻혀 있다면 말이다. 

붓다도 그대와 똑같은 거지였다. 그는 본래부터 붓다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가서 그는 갑자기 마스터가 되었다. 그것은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붓다는 축적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걸한 것을 모아서 황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는 부유한 거지였다. 그러나 거지임에는 마찬가지다. 사실 부유한 거지가 가난한 거지보다 더 큰 거지이다. 

붓다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속에 감추어진 보물을 깨달았다. 그때 그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었다. 그는 마스터가 된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와 고타마 붓다와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대와 붓다 사이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대 내면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면 그대 역시도 붓다와 똑같다.  

아주 작은 방편 하나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이 있다. 장님에게는 이 세상이 우리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수술이라는 간단한 절차를 통해서 그의 세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전에 없었던 눈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내면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면 그대는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마치 장님이 눈을 뜨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되어야 할 그 무엇이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미래는 벌써 현재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이 여기 씨앗 속에 들어 있다. 단지 문만 열리면 된다. 간단한 외과수술만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영적인 것은 벌써 거기에 있다. '그토록 간단한 방편이 도움이 될까'라고 의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작은 노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오히려 아무런 노력 없이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다. 사실 그대가 하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성취하기가 더 어렵다. 그대의 노력과, 긴장과, 기대심과 갈망 이 모두가 장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적은 노력으로, 소위 '노력없는 노력으로' 할 때 그것은 쉽게 일어난다. 그리고 선(禪)에서는 그것을 ‘함이 없는 함(無爲)'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쉽게 일어난다. 그대가 그것을 이루려고 애가 달아오를수록 그것은 더 가능성이 적어진다. 바늘이 필요한 곳에 장검을 갖고 덤비기 때문이다. 그때 장검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도살장에 가보라. 거기에서는 커다란 도구들이 사용된다. 그러나 신경외과에 가보라. 도살장에서 보던 거대한 도구들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신경외과에서 그런 거대한 도구들을 보게 되면 당장 달아나고 말 것이다. 신경외과의는 도살꾼이 아니다. 그는 매우 섬세한 도구들만 사용한다. 작을수록 더 좋은 것이다. 

영적인 방편 역시 섬세하다. 그것들은 무식하게 거대하지 않다. 그것들은 뇌수술보다 더 섬세하다. 그대는 영적인 차원에서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방편들은 너무나 섬세하고 예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어떤 것이 매우 작다면 어떻게 그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이 나올 수 있는가?"

작은 것에서 큰 것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일견 모순처럼, 혹은 비과학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작은 것, 미세한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리고 작을수록 그것은 훨씬 귀중한 것이 되었다. 그대는 2차대전 때 일본에 떨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을 기억하는가? 그 폭탄이 터지는 순간 20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그대는 원자를 볼 수 없다.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작은 것이 원자다. 그것은 지금 어떤 기계를 동원해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효과를 볼 수 있다. 엄청난 효과를 말이다. 

그러므로 히말라야가 커다란 덩치를 갖고 있다고 해서 거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원자폭탄이 나오기 전에나 큰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작은 원자 하나만으로도 삽시간에 히말라야를 없애 버릴 수 있다. 물체가 크다고 해서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은 것일수록 훨씬 무서운 힘이 숨어 있다. 

이 작은 방편들은 원자력과 같다. 겉모습만 크게 보이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원자과학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원자처럼 작은 알갱이에 매달려 일하는 사람들은 하찮은 일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을 보라.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을 것이다. 

도덕 군자들은 항상 큰 것만 생각한다. 그리고 커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생애를 큰 것에만 투자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큰 것에 관심이 없다. 탄트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원자의 비밀 같은 것에만 관심이 있다. 인간의 마음, 인간의 의식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탄트라는 원자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대가 이 비밀을 알게 되면 그 결과는 폭발로 나타날 것이다. 우주적인 폭발로 말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만약 그대가 '어떻게 이 작고 간단한 것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이 방편을 전혀 실행해 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실행했다면 그때 그대는 그것을 간단하거나 작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그 방편에 대한 서술이 두세 문장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대는 원자핵의 공식을 본 적이 있는가? 두세 개의 문자로 전공식이 끝난다. 그 공식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은 설명이 필요 없다. 단지 꼭 필요한 문자 몇 개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대는 그 공식만을 보고 대단치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공식이다. 

호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수많은 호흡을 들이쉬었지만 한번도 그것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아마 그대는 이 말에 즉시 반대할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계속 의식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호흡을 느낀다.” 

그러나 아니다. 그대는 호흡을 느끼지 못한다. 단지 공기의 흐름을 느낄 뿐이다. 

바다를 보라. 거기에 파도가 있다. 그대는 파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파도들은 바람에 의해 생겨난다. 그대는 바람을 볼 수 없다. 그대는 단지 물 위에 생겨나는 바람의 효과만 볼 것이다. 그대는 콧구멍을 스치는 공기의 흐름만을 느낄 뿐이다. 그것은 호흡 자체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바가 '깨어 있어라'라고 한 말의 의미가 아니다. 먼저 그대는 공기의 흐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 흐름을 완전히 인식하게 될 때 호흡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드디어 그대는 호흡의 정지 순간을 잡아낼 수 있다. 그것은 보기보다 수월하지 않다. 그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탄트라에서는 각성의 여러 단계가 있다. 만약 내가 그대를 껴안는다면 그대는 나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몸에 대한 촉감부터 먼저 느낄 것이다. 사랑은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섬세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은 그 육체를 먼저 느낀다. 만일 내가 그대에게 키스를 한다면 그대는 내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입술을 먼저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입술만을 느낀다면 그 키스는 죽은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약 그대가 나의 사랑을 느낀다면 그때 비로소 그대는 나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이미 그대는 깊숙이 들어가 있다. 

호흡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호흡이 아니라 호흡의 촉감만을 느낀다. 그리고 잘못하면 촉감마저도 못 느낄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흡의 촉감도 못 느낀다. 그대가 쉽게 그 촉감을 느낄 수 있기만 해도 그대의 마음은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몸에 고장이 있다면 그때는 금방 느낄 것이다. 호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평상시에 호흡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먼저 공기의 흐름에서 생기는 촉감부터 느껴라. 그대의 감각은 점점 예민해지고 관찰력 또한 섬세해질 것이다. 촉감이 아니라 호흡 자체를 느끼는 데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만큼 그것은 미묘한 것이다. 그때 탄트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는 프라나(prana: 生氣)를 알았다.”

 

그때 비로소 호흡이 멈추는 순간이 나타나며, 호흡 사이에 간격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호흡의 회전점이 보일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대의 감각이 무디다면 그때까지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만약 그대가 어떤 것을 한다면, 그대가 이 중심 속으로 들어간다면,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될 것이다. 붓다는 호흡을 초월한 이 중심에 이르는 데 6년이 걸렸다. 6년이라는 험난한 여정 끝에 드디어 그 일이 일어났다. 마하비라 역시 쉽지 않았다. 그는 붓다의 두 배에 해당하는 12년이 걸렸다. 그러나 공식은 간단하다. 이론적으로는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사실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이론상으로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지금 당장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그대 때문이다. 그대 자신이 바로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대만 사라진다면 이것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보물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방법 역시 알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파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대는 결코 그것을 파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은 보물을 파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 있을라고? 웃기지 마라. 어떻게 그리 쉽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야 그대가 어떻게 한 사람의 붓다가 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것을 쉽다고만 말할 뿐 그것을 실행하려고 들지 않는다. 원래 속임수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마음이다. 만약 내가 이 방편이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또 너무 어렵다고 불평할 것이다. 쉽다고 말할 때는 바보들만 한다고 말하고, 어렵다고 말하면 어려워서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변명만 갖다 댄다. 그리고 실행에는 결코 옮기지 않는다. 

이론상으로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거기에는 아무런 실제적인 장애물이 없다. 그러나 사실 장애물들은 있다. 그것들은 실제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반드시 있다. 그것들은 심리적인 것이며 그대의 환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그대의 공포가 존재한다. 그대에게는 밧줄이 뱀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대는 떨고 있으며 달아나서 숨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단순한 밧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대의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사람은 뱀을 비유해서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뭔가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이 사람은 내가 뱀을 향해 가도록 유혹하고있다.” 

이론상으로는 밧줄을 그저 밧줄로 즉시 바라볼 수 있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마음은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실제로 거기에는 어떤 함정도 없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은 그대가 마음을 통해서 실체를 보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은 하나의 감옥같은 기능을 한다. 그것은 쉴새없이 문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자체에는 절대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대는 문제 없이 사물을 볼 줄 모른다. 그대가 무엇을 보든지 거기에 문제가 만들어진다. 보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처음에 증기기관이 발명되었을 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그대가 매일 볼 수 있는 주전자나 냄비에서 나오는 증기와 똑같은 것이다. 그 증기의 힘으로 거대한 기차가 수백 명을 태우고 달린다고 한다면 그대는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믿을 수가 없다. 처음으로 영국에서 기차가 발명되었을 때 아무도 그 기차를 타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은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사람들이 기차를 타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돈을 내고 기차를 타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서 타는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그 기차를 악마라고 생각했고, 악마는 언제나 움직이면서 여기저기를 달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론상으로 기차는 얼마든지 멈출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아직 없었다. 기차가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론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실제 경험만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것이 멈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 누가 그것을 타겠는가?” 

그래서 결국 열두 명의 죄수들이 강제로 기차에 태워지게 되었다. 그들은 사형수들이었기에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기차가 멈추지 않는다고 해도 별로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그 미친 기관사, 기차를 발명하고 열두 명의 사형수들을 그것에 태운 그 미친 과학자는 기차가 멈추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당시에 사람들은 '증기처럼 간단한 것'이라는 유행어를 썼었다. 그들의 눈에는 정말로 불가사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의 비밀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한번 그것을 알면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알 때까지의 과정은 힘든 것이다. 그것은 실체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 때문이다. 이 방편들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간단하지가 않다. 그대의 마음이 어려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만!


'Osho > 탄트라비전1'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탄트라의 세계  (0) 2021.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