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사
랑
이
라
는
이
름
의
깨
달
음
From Addictive
to Enlightnment Relationships
사랑은 존재의 상태입니다.
사랑은 외부가 아닌,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사랑을 잃을 수 없고,
사랑도 당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육체와 같은
어떤 외적 형태에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ㆍ애증의 관계ㆍ─────
당신이 현존에 자주
다가가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관계,
특히 아주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는
깊은 상처가 생기며 마침내 무너지게 됩니다.
가령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잠깐 동안 그 관계가 완벽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것들은 논쟁, 갈등, 불만이 쌓이고, 감정적 심지어 신체적 폭력까지 빈번해지며 어김없이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연인 관계'가 오래지 않아 애증 관계로 변하는 걸 흔히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때 사랑이라 여겼던 감정이 험악한 공격과 적대감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단 한 번의 계기로 사랑하는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인간관계에서 '사랑'과 동시에
그와 상반되는 감정인 공격성이나 폭력성을 경험하고 있다면,
당신은 에고의 집착과 중독적인 애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을 사랑하다가 다음 순간 그 사람을 공격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도 상반된 감정까지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상반되는 감정까지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더 완벽하고 깊은 자아감각을 필요로 하는 에고의 욕구일 뿐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상에 불과합니다. 에고가 구원을 대신하여 선택한 감정이 잠시 동안 거의 구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고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상대방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순간이 되면, '연인 관계'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두려움, 고통, 결핍과 같은 에고의 본질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중독성 약물과 마찬가지로 약효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기분이 한창 고조되지만,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다시 고통이 시작되면, 그 고통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고통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게 됩니다. 이는 고통의 감정들을 외부로 투사하는 것으로, 이런 경우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일부인 잔인한 폭력까지 모두 동원하여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이런 공격은 상대방의 고통을 자극하여 깨어나게 하고, 역으로 상대가 당신을 공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때 에고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나 그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시도가 형벌로 작용하여 상대방의 행동이 변화하기를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고통을 가리는 데 다시 이용하려 합니다.
모든 중독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는 걸 거부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중독은 고통으로 시작해서 고통으로 끝이 납니다.
알코올, 음식, 약물, 사람 등 당신이 무엇에 중독되든, 모든 중독은
자신의 고통을 덮기 위해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애정 관계에서 초기의 황홀감이 사라지고 난 후에 불행과 고통이 남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관계 자체가 고통과 불행의 원인은 아닙니다. 인간관계는 당신 내면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고통과 불행을 끌어낼 뿐입니다. 모든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중독이라도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순간에 이릅니다. 그때 당신은 이전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현재의 순간을 벗어나 미래에서 일종의 구원을 찾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때, 그들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이 순간에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알게 된다면, 현재 이 순간의 힘이
과거와 과거의 고통을 소멸시키고, 현실이 당신의 환상을 깨뜨릴 것입니다.
그저 자신이 현실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신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인간관계 자체를 피하는 것도 해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고통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입니다. 3년 동안 세 번이나 실연을 당한다고 해도 같은 기간 동안 무인도에서 살거나 방 안에만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혼자 있으면서도 강렬한 현존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당신에게 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ㆍ성숙한 사랑의 의미ㆍ─────
혼자 살든
누군가와 함께 살든, 중요한 것은
현재에 머물며 지금 이 순간에 좀 더 깊이
관심을 가짐으로써 더 강렬하게 현존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현존이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이 생각하는 자나 고통체에 더 이상 지배당하지 않고,
그것들을 자신으로 착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자의 근원이 되는 존재로서,
마음의 목소리 저변에 흐르고 있는 고요함으로서,
고통의 밑바닥에 있는 사랑과 기쁨으로서
당신 자신을 인식하는 건
자유이며, 구원이고, 깨달음입니다.
고통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고통 안으로 현존을 끌어들여 고통에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각과 행동, 특히 마음의 반복적인 패턴을 조용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아'를 느끼며 마음에 집중하고 집착하는 걸 멈춘다면, 마음은 충동적 성질을 잃게 됩니다. 그 성질 때문에 마음은 충동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그대로에 저항하며, 갈등과 사건과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며
판단을 멈추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사랑, 기쁨, 평화를 위한 자리가 생깁니다.
우선 자신에 대한 판단을 멈추세요.
그리고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도 중지하세요.
관계를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바꾸려 하지 말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 당신은 에고를 초월합니다.
모든 마음의 게임에서도,
중독이나 다름없는 집착에서도 해방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희생자도 가해자도 없으며,
비난하는 사람도 비난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고,
누군가의 무의식적인 패턴에 휩쓸려
계속 똑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도 끝납니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존재 속으로, 지금 이 순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너무나 간단하지 않나요?
사랑은 존재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외부가 아닌,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사랑을 잃을 수 없고,
사랑도 당신을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랑은다른 사람의 육체와 같은
어떤 외적 형태에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존재의 고요함 속에서,
당신은 형태와 시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본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드러나지 않는 생명과도 같습니다.
다른 모든 이들과 모든 창조물 깊은 곳에서도
이와 같은 생명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은 형태와 분리의 장막 너머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하나됨에 대한 깨달음,
바로 사랑입니다.
당신이 마음과
동일화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체를 사라지게 할 만큼 현존이 강렬하지 않거나
관찰자로서 현재에 머물 수 없다면, 진정한 사랑은
잠시 엿볼 수는 있어도 풍성하게 꽃피울 수는 없습니다.
그럴 경우 고통체는 당신을 지배하고
당신의 사랑을 파괴할 겁니다.
─────ㆍ깨달음을 위한 인간관계ㆍ─────
인류가 마음과 자신을 점점 더 동일시할수록,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존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고통의 근원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문제와
갈등으로 인해 인간관계는 흔들립니다.
인간관계가 지금 이 시간에도 에고를 강화하고 확대하며 고통체를 활성화하고 있다면, 그 관계에서 도망을 치기보다 차라리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인간관계를 피하거나 당신의 문제에 해답을 주고 충만함을 느끼게 해줄 이상적인 배우자를 찾아 헤매는 대신 당신이 처한 상황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해보는 건 어떨까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 상황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관계에서 불화가 생겼을 때,
그 사실을 자각하고 '앎'의 상태를 유지해보세요.
그러면 그 '앎'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요소가 생겨나며,
불화는 지속되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이 평화로운 상태에 있지 않고
불안을 느끼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그 불안을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포옹으로 감싸는 고요한 공간을 만들어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불안은 평화로 바뀔 수 있습니다.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바꿀 수도 없고, 당신이 상대방이나 그 누구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자비와 사랑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전부입니다.
관계가 삐걱거릴 때마다,
당신과 상대방의 내면에 '광기'가 솟아오를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구원의 기회입니다.
모든 순간마다 그 순간을 인식하세요.
특히 당신의 내면 상태를 인식하세요.
만약 분노하고 있다면,
당신의 내면에 분노가 있음을 인식하세요.
질투, 방어, 말다툼, 합리화, 사랑과 관심을 요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 혹은 어떤 종류의 감정적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 순간의 현실을 인식하고, 그 '앎'의 상태를 유지하세요.
그러면 인간관계는 당신의 사다나sadhana(탄트라 불교에서 해탈에 이르는 성취법 ― 옮긴이), 다시 말해 당신을 위한 영적 수행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가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을 했다면, 그것에 반응하기보다는 당신의 앎으로 그 행동을 사랑스럽게 감싸주세요.
무의식과 인식the knowing은 오랫동안 공존할 수 없습니다. 정작 무의식 상태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만 그 사람의 행동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그렇습니다. 적개심과 공격성 뒤에 숨어 있는 에너지의 형태는 사랑의 현존을 견디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무지에 반응하면,
당신도 무지에 휩쓸리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의 반응과 행동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인간관계가 문제와 갈등에 얼룩진 적은 없었습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듯이, 인간관계는 행복이나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계속해서 환멸만을 느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행복이 아닌 깨달음을 위한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인간관계에서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찾아올 더 높은 차원의 의식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낡은 습관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통, 폭력, 혼란과 광기만이 커져갈 겁니다.
당신의 삶을
영적 수행의 장으로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할까요?
배우자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온전한 의식은
오로지 당신을 통해서만 이 세상으로 올 수 있습니다.
당신이 깨닫기 전에 이 세상이 온전해지기를, 누군가가 깨닫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려면 영원히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해 서로를 탓하지 마세요. 다투기 시작하는 순간 마음 자세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그 마음 자세뿐만 아니라 자아감각도 방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에고에게 당신을 내어주고, 당신은 무의식의 상태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의 행동에서 어떤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 적절한 때도 있습니다. 당신이 깨어 있는 상태로 현재의 순간에 존재한다면, 에고를 관여시키지 않은 채 비난이나 원망 없이 상대방의 행동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때,
어떤 판단도 하지 마세요.
판단이란 누군가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그들의 본질이라고 착각하게 하거나,
당신 자신의 무의식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여
그것을 그들의 본질이라고 오해하게 합니다.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이 보아온 상대방의 문제점과 무의식을
자각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응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앎'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전혀 반응하지 않거나, 반응은 하지만 자각하고 있어서 반응을 주시하고 허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둠과 싸우는 대신,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망상에 반응하는 대신, 망상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그것을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앎의 상태에 있다는 건
모든 사람과 만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을 위한 현존의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변화를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계기는 없습니다. 당신이 이런 수행을 거듭한다면, 당신의 배우자 역시 무의식 상태에 머물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과 배우자가 모두 인간관계가 영적 수행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더 좋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면 매 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그 즉시 상대에게 표현할 수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나 불만이 더 쌓이고 자라날 수 있는 시간적 공백을 만들지 않게 됩니다.
비난하지 않고 당신이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세요.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열린 방식으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법을 배우세요.
상대방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주세요.
현재에 머물도록 하세요. 그러면 비난, 방어, 공격과 같이
에고를 강화하거나 보호하고, 에고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이 모든 방식들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여지를 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사랑을 꽃피울 수 없습니다.
관계를 파괴하는 두 가지 요인을 제거한다면,
다시 말해 고통체를 소멸시키고 자신을 더 이상 마음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상대방 역시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관계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에게 고통과 무의식을 투사하고 중독적인 에고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대신, 내면 깊은 곳에서 느끼는 사랑을 서로에게 투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랑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당신이 하나라는 깨달음에서 옵니다.
이것이 바로 대립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당신은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상대방이 여전히 자신을 마음이나 고통체와 동일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보다는 상대방에게 큰 시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 함께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너무 쉬워서 상대방의 에고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에고는 자신의 정체성이 의존하고 있는 분리감을 강화하기 위해 문제와 갈등 그리고 '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세요. 저항이 없어진 상태에서, 깨닫지 못하고 무의식 속에 있는 상대방의 마음은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될 겁니다. 이는 마음이 차지하고 있던 위치가 불안전하고 쇠약해는 것이며, 심지어 마음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고통체는 무언가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필요한데, 더이상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말다툼, 사건, 갈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ㆍ자신과 하나가 되는 순간ㆍ─────
깨달음의 여부와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남자 아니면 여자입니다. 형태의 정체성에서 당신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온전한 전체의 반쪽에 불과합니다. 이런 불완전함 때문에 깨달음의 정도를 떠나 우리는 남녀의 이끌림, 이성을 향한 끌림을 느낍니다. 그러나 내적인 연결 상태에서는 이런 끌림이 삶의 표면 혹은 삶의 주변 어딘가에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다른 사람이나 배우자와 깊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당신이 존재에 대해 자각하고 있을 때에만 타인과 깊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존재로서의 당신은 형상의 장막 너머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존재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하나입니다. 형상은 지속적으로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존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존재는 이미 완벽하고 온전합니다. 만약 그런 욕구가 충족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내면 깊은 상태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성에 대한 욕망이 실현되지 못한다고 해도, 깨달은 사람은 존재의 외적인 차원에서는 결핍감이나 불완전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완전하고 충만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 불안함을 채워줄 관계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분명 또 다른 형태의 불안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마도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려 할 겁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반드시
자신과의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저 당신 자신일 수는 없을까요?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이 두 개로,
다시 말해 '나'와 '나 자신’,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이런 이중성이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필요한 복잡함, 모든 문제와 갈등의 뿌리입니다.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당신은 곧 당신 자신이며,
'당신'과 '당신 자신'이 하나가 됩니다.
자신을 판단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연민도 자부심도 느끼지 않게 되며,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증오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반성적인 의식 때문에 생겨난 분열은 치유되며,
그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보호하고, 방어하고,
먹이를 주어야 할 자신은 더 이상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때, 자신과의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것을 포기하면, 모든 다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됩니다.
'Eckhart Tolle > 이 순간의 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깨달음을 위한 두 번의 기회 (0) | 2021.05.04 |
---|---|
08 스스로 삶을 책임진다는 것 (1) | 2021.05.04 |
05 보이지 않는 세계와 만나다 (0) | 2021.05.04 |
04 무의식을 넘어 존재의 빛으로 (0) | 2021.05.04 |
02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0) | 2021.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