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기
Acceptance and Surrender
08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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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을
책
임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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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
Acceptance of the Now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있을 때,
과거는 힘을 잃게 됩니다.
마음에 가려져 있던 존재의 영역이 열립니다.
갑자기 거대한 고요함이 내면에서 솟아오르고,
평화에 대한 불가해한 감각이 떠오릅니다.
그 평화 안에 크나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중심부에 신성하고,
헤아릴 수 없는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그것이 있습니다.
─────ㆍ덧없음과 헛됨ㆍ─────
일이 잘 풀려서
성공이 계속되며 번창하는 때가 있고,
실패가 거듭되며 위축되고 시들해질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과 변화를 위한 여지를 만들려면,
과거의 것들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당신이 그 시점에서 매달리며 저항한다면, 그건 삶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그럴 경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것이 성장하려면 소멸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주기는 다른 주기 없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영적 깨달음을 위해서는 하강 주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려면, 크게 실패를 하거나 깊은 상실 혹은 고통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 그 자체가 공허해지고 의미가 퇴색하여 결국 실패로 변합니다.
모든 성공 안에는 실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실패 안에는 성공의 씨앗이 있습니다. 형상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언제가 반드시 '실패'를 하고, 모든 성취는 헛된 것이 되어버릴 겁니다. 모든 형상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적극적으로
새로운 형상과 환경을 만들고 창조하는 걸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자아감각을 형성하는 데 그런 것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창조한 형상과 환경은 당신의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당신의 삶이 처한 상황일 뿐입니다.
당신의 육체도 상승하고 하강하는 주기의 영향을 받습니다. 주기란 몇 시간에서 몇 년까지 지속되기도 합니다. 긴 주기가 있고, 그 안에 짧은 주기가 있습니다. 낮은 에너지의 주기에 맞서 싸울 때 질병이 많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침체된 주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 당신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채 외부 요인으로부터 자존감과 정체성을 끌어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피할 수 없는 환상으로, 침체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허용하는 걸 힘들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당신이라는 유기체의 지성이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질병을 만들어 당신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이 휴식을 취한 다음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인간관계나 재산, 사회적 지위, 직장
혹은 신체적인 면에서 상황이 '좋다'고 생각될 때,
마음은 그것에 집착하여 자신과 그것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행복을 느끼고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여, 그것이
당신의 일부 혹은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낡고 녹슨 이런 차원에서는 아무것도 지속되지 않고, 모든 것은 사라지거나 변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어제 혹은 작년에는 좋았던 조건이 갑자기 혹은 점차적으로 나쁜 것으로 바뀝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조건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오늘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던 것이 내일 텅 빈 소비지상주의로 비치기도 하고, 행복한 결혼과 신혼여행이 불행한 이혼이나 동거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혹은 조건 자체가 사라지면서 그것이 당신을 불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애착을 갖고 동일시했던 조건이나 상황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라진 조건에 매달리고 변화에 저항합니다. 팔다리가 몸에서 잘려나간 것처럼 느끼는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행복과 불행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시간이라는 환영이 행복과 불행을 분리시킬 뿐입니다.
삶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건
품위, 편안함, 빛 속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상태는 어떤 방식으로든 좋거나 나쁜 것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형상에 의존하지 않을 때,
삶의 일반적 조건, 외적 형상이 크게 좋아지곤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물건, 사람, 조건들이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그것들이 당신 곁에 머무는 동안은
당신은 마음껏 그것들을 누리고 즐깁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도 지나갑니다. 왔다가 가버립니다. 그러나 의존하지 않으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삶은 편안하게 흘러갑니다.
상황에서 비롯된 행복은 결코 깊지 않습니다. 저항 없이 내면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발견한 생기 넘치는 평화와 존재의 기쁨에 비하면, 그런 행복은 희미하게 반사되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존재는 마음의 양극단 너머로 당신을 데려가고 형상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심지어 주변의 모든 것이 바스라지고 무너져도, 당신은 여전히 깊은 내면의 평화를 느끼게 될 겁니다.
어쩌면 당신은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평화로울 겁니다.
─────ㆍ스스로 투명해지기ㆍ─────
모든 내적 저항은
어떤 형태로든 부정적인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부정적 감정이 나타나는 건 마음이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두 단어는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짜증이나 초조함부터 극심한 분노까지, 우울한 기분이나 억울함부터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절망까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저항이 감정적 고통체를 촉발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화, 우울, 깊은 슬픔과 같은 강렬한 부정적 감정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에고는 부정적 감정을 통해 현실을 조종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부정적 감정으로 원하는 조건을 끌어당기거나 원하지 않는 조건을 없앨 수 있다고 여깁니다.
불행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즉, 당신 마음이 무슨 이유에서 불행을 만들어내겠습니까? 물론 부정적 감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부정적 감정은 바람직한 조건을 끌어당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조건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또한 바람직하지 않은 조건을 몰아내기는커녕 그것이 확실히 자리를 잡도록 합니다.
부정적 감정은 에고를
강화하는 데 유용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에고가 부정적 감정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어떤 부정적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것을 떠나 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또한 무의식 깊은 곳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긍정적 감정은 우울, 분노, 홀대받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 인생의 긍정적인 면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합니다. 이건 미친 짓이지만,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식물이나 동물을 관찰해보세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을 맡기는 법을 배우세요.
그들이 당신에게 존재를 가르쳐줄 겁니다.
그들에게 온전함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서 하나가 되는 것을,
당신 자신이 되고, 실재하는 것을 배워보세요.
그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지, 삶과 죽음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지 가르쳐줄 겁니다.
반복되는 부정적인 감정에는 질병과
마찬가지로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직업, 인간관계, 주변 환경 등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도, 의식의 차원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허울에 불과합니다.
변화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경우뿐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더 오래 머무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현존에 도달하면,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려주는 부정적 감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정적 감정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조금 더 현존해야 한다는 걸 일깨워주는 신호입니다.
외적인 요인이나 당신의 생각에 의해
혹은 당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원인에 의해
내면에서 부정적 감정이 생겨날 때마다, 그것을
'명심해,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해. 깨어나.
마음에서 벗어나, 현존하는 거야'라고
당신에게 경고하는 목소리로 받아들이세요.
아주 사소한 짜증도 중요한 신호일 수 있으므로
놓치지 않도록 주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반작용이 축적될 것입니다.
내면에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 축적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런 부정적 감정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정적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났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벗어날 수 없다면, 그런 감정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느낌에 주목해야 합니다.
부정적 반응을 떨쳐버리는 대신,
반응의 외적 요인에 투명해지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부정적 반응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작은 일,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로 연습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이 집에 가만히 앉아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갑자기 길 건너편에서 날카로운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리고, 짜증이 납니다. 짜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아무런 목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왜 짜증을 냈을까요?
당신이 짜증을 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이 짜증을 낸 겁니다. 그것은
완전히 자동적이고, 완벽하게 무의식적인 반응입니다.
마음은 왜 짜증을 만들어 냈을까요? 어떤 형태로든 부정적 감정이나 불행에 저항하면, 바람직하지 않은 조건이 해소될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착각입니다. 앞에서 말한 경우에는 짜증과 화로 나타난 것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조건에 대한 저항감은 그것이 해소하고자 하는 원래의 원인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영적 수행을 통해 변화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투명해지는 것을 느껴보세요.
물질적으로 견고한 당신의 육체가 없는 상태라고 느껴보세요.
이제 소음을 비롯해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든
당신을 통과해가도록 두세요. 당신의 내면에서
단단한 '벽'에 더 이상 부딪치지 않도록 합니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우선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세요. 자동차 경적, 개 짖는 소리, 아이들 울음소리, 교통 체증과 같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부딪치지 않도록 내면에 저항의 벽을 쌓아두지 마세요. 그 대신 모든 것이 당신을 통과하도록 내버려두세요.
누군가 당신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무례한 말을 한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부정적 감정에 빠져드는 대신,
그것들이 당신을 그저 통과해가도록 하세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마세요.
마치 상처받을 사람이 거기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세요.
그것이 용서입니다. 이런 방식이라면 당신은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상대방에게 그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당신의 내면 상태를 좌우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다른 누군가의 힘이나 당신의 마음에게 지배받지 않고, 오직 당신의 영향력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거나, 무례한 사람과 함께 있거나, 홍수나 지진을 겪고, 재산을 잃은 상황에서도 저항의 원리는 똑같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외부에서 평화를 구하고 있으며, 이런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음 모임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도 있고, 새로운 방법에서 답을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평화를 찾아 헤매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다른 상태를 추구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내면의 갈등을 겪으며 그것에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게 됩니다.
평화에 머물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하세요.
당신이 평화로운 상태에 있지 않다는 걸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그 평화롭지 못함이 평화로 변화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으면,
당신은 평화로워질 수 있습니다.
온전히 내어주고 맡길 때,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모든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ㆍ죽기 이전의 죽음ㆍ─────
마음이 만들어내는
모든 대립에서 초월하는 순간,
당신은 마치 깊은 호수와 같은 상태가 됩니다.
당신 인생의 외부적인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변화하는 것은 호수의 수면일 뿐입니다.
호수의 수면은 날씨와 계절에 따라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바람이 불어 거칠게 요동칩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당신은 호수 표면이 아니라 온전한 호수 전체입니다.
당신은 절대적으로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당신의 깊은 내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의 상황에 정신적으로 얽매여서 변화에 저항하지도 않게 됩니다. 내면의 평화는 그런 삶의 상황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변함없는 상태로 시간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 안에 머물며 끊임없이 형태가 변하는 외부 세계의 성취나 행복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변화하는 형상들을 즐기고,
그것들과 놀이를 하고,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며,
그 모든 것의 아름다움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것에도
집착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존재를 자각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조차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형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겠지만, 그들의 형상이란 육체만이 아닌 그들의 마음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관계는 오직
존재에 대한 자각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존재를 인식하게 되면,
다른 이들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화면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마치 당신의 진정한 현실을 느끼듯이, 그 화면 뒤에 있는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고통이나 무의식적인 행동과 마주해도, 당신은 존재와 연결된 채 현재에 머물고 형상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당신의 존재를 통해 그들의 찬란하고 순수한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존재의 차원에서
모든 고통은 환상과 같습니다.
고통은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때로는 이런 깨달음은 준비가 된 이들 안에서 존재 의식을 일깨우면서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자비심(연민)은
자신과 모든 창조물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입니다.
'나는 이 사람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라는 생각이 들 때,
사실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아주 많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몇 년이 지나지 않아, 2년 후나 70년 후에는 우리 모두는 시체가 되어 썩고, 먼지 더미로 변하고,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조금의 여지도 없는, 진지하고 겸손한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부정적인 생각일까요?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왜 그것을 외면하려 합니까? 이런 의미에서 당신과 다른 창조물은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가장 강력한 영적 수행 중 하나는
육체를 포함해서 물질적 형상의 죽음에 대해 깊이 명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죽기 이전의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십시오.
당신의 물질적 형상은 분해되어 사라집니다.
그러면 모든 마음의 형상과 생각들이 없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신성한 현존으로 빛을 발하며,
완전히 깨어 있습니다.
진정한 것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로지 이름과 형상과 망상만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런 깊은 차원에서 자비심(연민)은
가장 넓은 의미의 치유가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신의 행위가 아닌 당신의 존재가 치유력을 갖게 됩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현존과 연결되고,
당신이 발산하는 평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자각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온전히 현존할 때는
주변 사람들이 무의식적인 행동을 해도
거기에 반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그 행동 자체에
현실성을 부여하지 않게 됩니다. 당신의 평화는 너무나도 넓고 깊어서
마치 평화가 아닌 것은 그 안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은 행동과 반응으로 이어지는 업보의 순환을 끊어버립니다.
동물, 나무, 꽃이
당신의 평화를 느끼고 그것에 반응할 겁니다.
당신은 존재를 통하여 신의 평화를 보여줌으로써
가르침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순수한 의식을
발산하는 '세상의 빛'이 되고,
고통을 뿌리째 제거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무의식을 없애는 것입니다.
─────ㆍ자신을 맡기는 지혜ㆍ─────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건
지금 이 순간의 의식 수준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 밖의 당신의 행동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의식 상태에서는
진정으로 긍정적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내맡긴다는 행위가 패배나 포기 혹은 인생의 도전에서 실패하고 무기력해지는 것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자신을 맡기어 순응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건 어떤 상황에서도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며 손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계획도 없이 긍정적인 행동을 하는 걸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내맡긴다는 건 간단한 행위이지만,
삶의 흐름을 거스르기보다는 순응하는 심오한 지혜입니다.
삶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내맡긴다는 건 어떤 조건이나 아무런 의구심 없이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이는 걸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에 내적으로 저항하는 걸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저항이란
마음의 판단으로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면서
있는 그대로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 특히 그렇게 되는데,
이것은 마음의 기대나 요구와 있는 그대로의 것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느 정도 인생살이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종종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시기에 삶의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자신을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져 존재와 만나게 됩니다. 저항은 마음입니다.
자신을 내맡긴다는 건
순수한 내면의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외적으로 당신이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고,
상황을 바꿀 수도 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내맡긴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그냥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작은 부분만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진흙탕 속에 빠져서 꼼짝 못하게 되었을 때,
'좋아, 일찌감치 체념하고 진흙탕 속에 이대로 있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달갑지 않고 불쾌한
삶의 상황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속이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은 진흙탕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세요.
어떤 식으로든 마음으로 상황을 구분하여 단정하지 말고,
현재의 순간으로 관심의 범위를 좁혀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저항도 부정적인 감정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있음'을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 행동을
긍정적인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화, 절망, 좌절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행동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지금 이 순간을 판단하여 분류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연습을 하십시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시각적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당신은 한밤중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오솔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손전등이 안개를 뚫고 당신 앞에 좁지만 밝고 환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안개는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인생의 상황입니다.
손전등은 의식적인 현존이며, 밝고 환한 공간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심리적인 형상, 즉 에고의 껍질이 단단해지며
당신이 느끼는 단절감도 강해집니다.
주변 세상과 특정한 사람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집니다. 판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솟아오르고, 다른 이들과 경쟁하고 그들을 지배하려는 욕구도 생겨납니다. 심지어는 자연조차 적이 되고, 당신은 모든 것을 두려움을 통해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편집증으로 알려진 정신질환은 이런 평범하지만 장애가 있는 의식이 조금 더 심각한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심리적 형상만이 아니라 물리적 형상인 몸도 저항을 하면 딱딱하게 경직됩니다. 몸의 이곳저곳이 긴장으로 굳고, 몸 전체가 위축됩니다. 건강에 꼭 필요한 생명 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운동과 물리적 치유법이 이런 흐름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킬 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을 내맡기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원인인 저항감이 해소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내면에는
삶의 상황을 구성하는 일시적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당신은 그것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삶이며,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의 영역 안에 있는
당신이라는 존재입니다.
삶의 상황이
불만스럽거나 견딜 수 없다면,
가장 먼저 자신을 맡기고 순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상황이 지속되며
무의식적인 저항도 멈출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변화를 시도하고,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행위와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맡김의 상태에서는
완전히 다른 에너지, 다른 자질이 행위 안으로 흘러듭니다.
자신을 내맡기는 순간,
당신은 존재의 근원적 에너지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행위가 존재 속으로 스며들면, 그것은
생명 에너지를 축하하는 행사가 되어 당신을
지금 이 순간속으로 조금 더 깊이 데리고 갑니다.
저항을 하지 않으면,
의식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당신이 수행하고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질적으로 향상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며, 결과의 질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을 '맡겨진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내맡김의 상태에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지고,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자연에서 배우세요.
세상의 만물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
불만이나 불행을 느끼지 않으면서
어떻게 삶의 기적을 펼쳐나가는지 지켜보세요.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백합을 보거라. 어떻게
이 백합들이 자라는가를 보거라.
길쌈도 힘든 수고도 하지 않느니라.”
당신이 처한 상황이
유쾌하지 않거나 불만스럽다면,
이 순간을 분리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내맡겨보세요.
마치 손전등이 안개를 가르는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러면 당신의 의식 상태는 외부 조건에 의해 지배받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거나 저항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세부적인 상황을 자세히 지켜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개선하려면 혹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만약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적절한 행동을 실행에 옮기세요.
미래의 어느 순간에
해야 하거나 하게 될지도 모를
수백 가지 일에 주의를 돌리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에 집중하세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쩌면 계획을 세우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당신 자신을 미래에 투영하는 '마음의 영화'를 틀어놓지 마세요. 그러면 지금 이 순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금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즉각적으로 결실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결실을 맺을 때까지 있는 그대로에 저항하지 마세요.
어떤 행동을 할 수 없고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면,
그 상황을 기회로 삼아 자신을 더 깊이 내맡기고,
지금 이 순간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존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보세요.
현재의 순간이라는 영원한 차원으로 들어가면,
당신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낯선 방식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삶이 당신의 편에 서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겁니다.
두려움, 죄의식, 타성과 같은 내적 요인들이 당신의 행동을
방해한다고 해도, 오래지 않아 그것들은 당신의
의식적인 현존의 빛 속에서
소멸해버릴 겁니다.
'이제 난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 거야' 혹은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어' 같은 태도를 내맡김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태도는 원망이 담긴 부정적 감정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내맡김이 아니라 그저 내맡김을 위장한 것일 뿐입니다.
자신을 내맡길 때에는
당신의 내면에 주목하며 혹시
저항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세요.
주의 깊게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줌의 저항이 생각이나 확인되지 않은 감정의 형상으로
어두운 구석 어딘가에 계속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ㆍ불행의 이유ㆍ─────
우선 마음의 저항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저항감이 일어날 때, 거기에 있으세요.
마음이 어떻게 저항을 만들어내며,
상황과 당신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꼬리표를 붙이고 구분하는지 지켜보세요.
마음이 저항할 때 당신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찰하면서
그 감정의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저항감을 주시하면,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면,
무의식적인 저항감은 의식이 됩니다.
그리고 저항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불행할 수도, 부정적일 수도 없습니다.
부정적 감정이나 불행, 고통은 어떤 형상으로든
그 안에 저항감이 있다는 걸 의미하며,
저항감은 언제나 무의식적입니다.
당신은 불행을 선택했나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어떻게 불행해졌을까요?
불행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누가 불행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걸까요?
불행한 느낌을 의식하고 있다고 해도, 사실은 불행한 느낌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강박적인 생각을 통해서 그 불행의 느낌을 살아 있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의식적입니다.
만약 당신이
의식적이라면, 다시 말해
온전하게 지금 이 순간에 머물고 있다면,
모든 부정적 감정은 즉시 사라질 겁니다. 그것은
현존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 오로지 당신이
현존하지 않을 때에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고통체pain-body조차도
현존 안에서는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불행에게 시간을 주어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시간은 불행의 생명줄입니다.
현재의 순간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시간을 제거하면 불행은 소멸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불행이 소멸하기를 바라고 있나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한 적이 있나요?
불행이 없다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 걸까요?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연습을 하기 전까지,
영적 차원이란
관련된 책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
흥분하고, 책을 쓰고, 생각하고, 믿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때
비로소 영적 차원은 당신의 삶 속에서
살아 있는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내맡길 때, 당신은 여전히
세상을 좌우하고 있는 마음의 에너지보다
훨씬 더 높은 주파수의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영적 에너지는 이 세상으로 들어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인류와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ㆍ스스로 삶을 책임진다는 것ㆍ─────
오직 무의식의 상태에 있는 이들만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기만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만이 이용당하고 기만당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저항하고 그에 맞서 싸운다면, 당신 스스로 무의식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이 무의식적인 사람들에게 이용당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면에서 완벽한 무저항의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아니오'라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거나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때에는 무의식적인 반응이 아닌,
그 순간 당신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명확한 통찰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순간적인 반응으로
'아니오'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더 높은 차원에서, 어떤 부정적 감정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더 이상의 고통을 만들어내지 않아야 합니다.
당신을 온전히 내맡길 수 없다면,
즉시 행동하십시오.
의견을 솔직히 말하거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그 상황에서 벗어나세요.
당신의 삶에 책임을 지십시오.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내면의 존재와 이 지구를
부정적 감정으로 오염시키지 마세요.
당신의 내면에 어떤 형태로든
불행이 들어설 자리를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경우,
예를 들어 교도소에 있다면, 당신은
저항하거나 내맡기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외적 상황에 구속될 것인가, 내면의 자유를 얻을 것인가
혹은 고통을 겪을 것인가, 내면의 평화를
누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자신을 내맡기면
인간관계도 크게 바뀝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결과적으로 당신은 어떤 사람도 존재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려 하고, 비판하고, 꼬리표를 붙이고, 거부하고, 바꾸려고 할 겁니다.
더구나 계속해서 지금 이 순간을 미래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리면, 당신이 만나거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또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관계는 당신에게 그저 부수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물질적 이득이나 권력, 육체적 쾌락 혹은 에고의 만족과 같이 인간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존재 자체보다 우선하게 됩니다.
내맡김이 인간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봅시다.
배우자나 가까운 누군가와
말싸움을 하거나 갈등을 겪고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이 공격당할 때
당신이 얼마나 방어적으로 되는지,
상대방의 입장을 공격할 때
당신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되는지를 관찰해보세요.
당신의 관점과 의견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살펴보세요.
당신이 맞고 상대방이 틀렸다는 고집의 이면에 있는
정신적, 감정적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그것이 바로 에고의 마음이 뿜어내는 에너지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충분히 느끼면서
그것을 의식하세요.
그러면 어느 날 말다툼을 하는 도중에,
당신은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될 겁니다.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지켜보겠다고 결심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내맡김'입니다.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이 모든 유치한 무의식을 초월하고 있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로만 '좋아, 네가 옳아'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또 다른 차원의 저항이며, 우월감에 차 있는 에고를 저항의 자리에 대신 앉혀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내면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에너지 장
전체를 떠나보내야 합니다.
에고는 교활합니다. 그래서 매우 조심해야 하며, 현재에 존재해야 하고, 마음의 입장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정말로 벗어났는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지를 정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갑자기 아주 가볍고,
분명하고, 심오한 평화를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정한 내맡김의 상태에 있다는
분명한 신호입니다. 당신이 저항을 멈추고
더 이상 상대방의 정신적 상태를 자극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세요.
당신과 상대방 모두
마음의 입장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때,
진정한 대화를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행위'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말합니다.
동양 무술의 기본 철학인 '상대의 힘에 저항하지 마라.
이기려면 굴복해라'라는 가르침이 의미하는 심오한 지혜를 기억하세요.
강렬한 현존 상태에 머무를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황과 사람을 변화시키고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의 의식 상태, 더 정확히 말해서 두려움,
관성, 망설임에서 비롯된 평범한 무의식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진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내면에서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하게 집중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어떤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더 이상 마음이 가는 대로 반응하지 않고
의식적인 현존 상태에서 상황에 대응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당신의 마음은 모든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심지어 비폭력이라는 개념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에고는 저항할 때 비로소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항은 진정한 힘의 근원인
존재와 당신을 단절시킵니다.
저항은 나약함이고, 힘으로 가장한 두려움입니다.
에고는
순수함, 결백함, 힘 안에 있는
당신의 존재를 나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에고가 강하다고 믿는 것은 나약함입니다. 그래서
에고는 끊임없이 저항하는 상태에 머물면서
사실은 당신의 진정한 힘과도 같은 '나약함'을 감추려
기만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내맡기기 전까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대부분 무의식의
상태에서 벌어지는 역할놀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내맡기게 되면,
에고의 방어도 거짓된 가면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매우 단순해지고,
진실해집니다. 그러면 에고는
'그건 위험해.
넌 상처받고 위험에 빠질 거야'
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에고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저항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유연한 상태가 될 때,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당신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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